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광용 Nov 11. 2023

아시아 화교 이야기

5. 화인의 동화와 정체성

 

  싱가포르를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화인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인도네시아의 중국인은  6백만 명 정도로 공표되고 있지만 어느 통계는 천만명  까지도 추산하고 있다. 그들의 상당수는 중국어를 모른다. 정부가 1950년대부터 중국어 사용을 금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화인은 주위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탄압을 많이 받았다.

말레이시아에서도 화인들은 정부의 '부미부트라'라는 정책에 의해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왔다. 그러나 태국의 화인은 정부가 그런 불공정하고 강압적인 정책을 쓰기 이전에 정부의 고민을 알고 스스로 동화 정책에 순응하고 탄압을 피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의 영향력을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서는 그런 탄압의 수난의 역사가  있었더라도  21세기  지금의 그들의 자국 내의 영향력은 역시 태국과 마찬가지로 지대하다.

그런 현상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인도네시아에서는 많은 화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역사가 있었고 말레이시아에서는 중국인들이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여 상위 교육기관에 다가가지 못하여 장사꾼으로만 살았다.

태국에서는 그런 수난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어로 교육을 받을 권리는 포기하고 태국어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하여 그들의 성과 이름을 태국식으로 하였다. 그러나 많은 화인들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중국의  춘절(春節), 중추(中秋), 청명(淸明)

백중(白中), 단오(端午) 등의 명절을 잊지 않고 지키며 기념한다.

청명, 백중, 단오는 우리 달력에도 표시되어 있고 그날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명절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어림도 없고 특별히 기억하는  기념일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인은 그가 어디에 살든 그날은 기억되고 기념한다. 춘절에는 다년반(團年飯), 중추에는 월병(月餠), 단오에는 찹쌀밥을 대나무 잎에 싸 먹는 쭝쯔(粽子)를 만들어 먹고, 청명에는 잊지 않고 조상 산소에 간다.

진씨네 가족의 열여덟 명의 형제자매 중에 가장 큰딸 제아이는 다른 형제와 달리 중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방콕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콩으로 가서 중국어 연수 학원을 다녔다. 당시에는 쉽게 결정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집이 이겼다. 그리하여 제아이는 중국어의 중요방언을 거의 전부 말할 수 있다.

만다린이라고 하는 중국 푸통화인 베이징어(mandarine, 普通話), 광뚱어(廣東, cantonese), 후지엔(福建, hokkin), 그리고 물론 그녀의 모어 차오저우어(潮州, teochew)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다. 거기에 영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모국어인 태국어를 합치면 도대체 몇 개의 언어 인가?

중국의 명절에는 온 가족이 다 모여 명절음식을 만들어 먹는데 메이의 친자와 손주뿐만이 아니고 코랏의 시누이 식구들,  차층사오의 시누이 식구들도 메이를 찾아뵌다.

거의 백세  가까이 연세가 드신 제1세대 이주인인 메이가 살아 있는 동안의 그러한 가족행사는 계속 이어지고 치러지겠지만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런 가족행사가 이어져 나갈지에는 의구스럽다.

그렇게 형제자매가 많은 가족은 서로의 협동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갈등도 그만큼 많을 수 있을 것이 인지상정이다.

태국의 화인 상황과  달랐던 인도네시아로 가보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50년 대부터 중국어를 사용  못하게 하는 등의 사회적 화교 탄압이 있어 왔다. 1965년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군이 쿠데타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작전에 나섰는데 진압군 사령관이 모하메드 수하르토였다. 수하르토는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자경단등의 준군사조직을  동원하여 공산당 색출에 나서서  공산당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현장 척결하였다.

학살된 사람들이 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도 있고 오십만이라는 추산도 있는데 하여튼 그 척결방법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칼과 죽창으로 목을 베고 배를 가르는 등 마치 남경에서의 일본군이 연상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학살당한 인구 중에 많은 중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이 의도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을 당한 것이다.

1966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수하르토는 이후 32년간을  독재로 통치하고 1998년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국민들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그리고 2008년에 사망했다.

수하르토는 집권 후 즉시 중국인을 현지인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는데 이는 중국어 사용금지와 인도네시아 성과 이름으로 창씨개명,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중국문화를 발현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슬람종교의 인도네시아인과 불교와 기독교의 중국인의 문화 동화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경제권까지 통제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다른 문제다. 강도처럼 무자비하게 빼앗는 방법이 아니고 서야.

화인들의 여자는 원주민 남성과 결혼을 하여 피를 섞는 일을 절대로 기피하였다. 그러나 화인 남성은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혼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문화를 정착시킨 태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리하여 적령기의  화인 신붓감은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70년대 말 당시 내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업무 출장으로 체류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지사에 근무하고 있는 이 과장이 나에게 와서 하는 말, "저녁식사는 나가서 하시지요."

"뭘 귀찮게 나가? 그냥 숙소에서 합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늘은 꼭 나가서 해야 해요."

이 과장이 뭔가 집요 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외식을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후덥진 자카르타 다운타운의 중국인 집산 골목이라  생각되는 곳에 있는 식당의 이층으로   마루판 계단을 쿵쿵거리며 올라갔다.

중국식당이라면 붉은색 천위에 검정글씨로 쓰인 메뉴가 벽에 걸려 있거나  중국 본토 풍경그림의 족자나 액자가 이곳은 중국음식점이요 하는 상징으로 걸려 있기도 하고 동자인형이나 황금색 돼지상, 그리고 금색으로 환영광림(歡迎光臨)이라고 쓰인  벽걸이 배나 등이 걸려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인테리어가 없는 식당이다..

중국풍을 드러 내놓기를 꺼려하는 인도네시아의 화교 삶의 방식인가?

그러나 고기를 삶는 쿰쿰한 냄새, 목재 식탁 위에 세팅되어있는 찻잔과 접시, 그리고 대나무 젓가락통은 전형적인 중식당의 모습이다.

"이 집에 특별한 보양식 메뉴가 있어요.  더운 나라에 와서 에너지가 많이 소실되시었을 테니 보양식을 드셔야죠." 그러면서 이 과장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한다.

주문을 하면서 식탁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린다. 아마도 주문할 음식의 이름을 몰라 손짓발짖 중에  손짓으로 소통하고 있는 것 같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요. 금방 올 거예요." 이 과장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  한 사람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이 과장이 일어서서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힌다.

"인사하시지요.  제가 친하게 지내는 신디라고 하는 화교 아가씨입니다."

그리고 신디에게 영어와 인도네시아 말을 섞어서 나를 소개한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이 과장이 소개하는 말을 요약하면 내가 본사에서 출장 온 중요한 인사라고 하는 것과 자기의 상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 말을 들은 신디는 나에게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한다. 중국인 다운 태도이다.

영어를 매우 능숙하게 구사한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매월 회사에 와서 월급을 타가는 이 과장 부인을 잘 알고 있는 처지다.

당시는 온라인 이라든가 하물며 은행계좌를 이용한  급여지급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원시시대였으니 해외근무 간부급 사원의 부인들은 월급날 회사에 나올 때  인사차 나를 만나러 오곤 한다. 그래서 안부도 묻고 남편 안부도 전해 주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지 여기에서 중국인 아가씨를 친구로 사귀고 있는 이 과장에 대하여 나는 단순히  '이 친구  재주 좋네. 해외근무의 외로움을  좋은 친구가 있어 달래주면 나쁠 것은 없지.' 하고 이해하면서 분위기와 타협하고 화기애애하게  팔각과 계피를 넣어 끓인 양고기탕을 먹었다.

한약 냄새가 콜콜나는  양고기 탕은 그 냄새로 하여 보양식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별미 음식이다. 이 과장이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병어조림이었다.

병어의 동그란 모양을 원을 그려 표시했는데 그게 그냥 통하는 모양이다.

병어는 당시 한국에서는 그렇게 대우를  받는 생선은 아니었는데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최고로 비싼 귀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는다.

이 과장이 주문한 병어조림은 그녀를 위해서 특별히 주문한 메뉴임이 틀림없다.

신디는 조용하고  조신한 태도를 흩뜨리지 않는 것을 보아 가정교육을 잘 받은 여자로 생각된다. 나이는 모르겠지만 결코 어린 나이의 아가씨는  아니다. 결혼을 한 적이 없다면 혼기를 놓친 노처녀로 봐야 할 것 같다. 광둥 성  출신 객가(客家, Hakka)인으로 이해했다.

아버지가 이민 1세 대라니까 비교적 화교사회의 신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친척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고 했다.

이튿날 이 과장이 나한테 와서 귓속말처럼 조용히 말한다.

"신디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그래?  당신 혼자 가.  내가 거길 왜?"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고 부장님을 초대한 거예요."

"어쩠던, 나는 안가"

그러나 결국 초대한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건 무슨 상황? 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 친지, 친척들일 게다.

푸짐한 음식도 음식이거니와 친척들을 모두 불러 그 두 남녀의 관계를 공개천명 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두들 이 과장을 사위 대하듯 하고 있다.

더욱이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이 과장 자신도  마치 사위라도 된 양 처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과장은 평소 한국에 있는 그의 세 아이에 대한 남다르게 집착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여졌었는데 어떡하려고 저러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신디가 조심스럽게 나한테 다가와서 귓속말로 물었다. "미스터리 한국에 부인이 있죠?"

나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머뭇 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신디는 조심스럽다기보다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에 대하여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는데 까닭 모르게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눈치채고도 남을 뻔한 거짓말을 했다. 모른다고. 그것은 그녀의 우려대로 한국에 부인이 있다는 말과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그때의 신디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현지인과는 절대로 혼인 안 하는 인도네시아 중국인 여인들은 혼기가 차도 짝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터에 멀쩡하게 생기고 말도 더불더불 잘하는 씩씩한 한국인 젊은이를 만났으니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

한국에서 결혼을 이미 했다 한들  무슨 대수랴?  여기는 머나먼 인도네시아인데.

우리는 돈도 있겠다,  붙잡아서 여기에서 살도록 만들자.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신디의 그 두려움의 표정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후 이 과장은 본사 발령으로 귀국을 했다.

반드시 그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러 사유가 있어 거기에 계속 놓아둘 수가 없었다.

이 과장은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는데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우연히 그를 만났다.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동으로 움직임을 감지하여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센서를 팔고 있었다. 언 듯 잘 되리라고  생각이 드는 아이템은 아닌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어쩐지 자신감을 잃은 듯한 그의 표정에  연민이 갔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그냥 인도네시아에서 눌러사는 인생도 괜찮치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어차피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고 또 만나면서, 또 헤어지면서 살다가 영원으로 헤어지는 것인데 아쉬워할 일은 무엇인가?     

작가의 이전글 아시아 화교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