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도네시아 외환위기와 화교의 수난
수하르토의 독재정권은 공산당을 때려잡는 것을 정치적 제스처로 하여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공산주의 노선을 걷는 수카르노를 제거하려면 지독한 반공주의를 앞 세워야 했다.
그래야 미국의 지지를 얻고 독재를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하고 화교를 척결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성공한 듯싶었으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배제하고 무슨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타협을 보았다. 중국 이주자가 정부가 제시하는 동화정책을 받아들이면 경제활동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는 사회적 타협이다. 앞에서 얘기한 신디네 집도 중국인의 정체성을 감추고 돈을 벌었을 것이다. 이름도 인도네시아식,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조차도 인도네시아 말로 하고 중국인 명절은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넘어가고, 한자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중국인이 대신 지켜야 할 한 가지 그것은 절대로 인도네시아인과는 피를 섞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지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남자와 현지인 여자는 그런대로 봐주는데 중국여자는 현지 남자와는 안 된다는 묵시적 룰이 적용되었다. 화교들과 권력은 유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은 돈을 벌었다.
물론 모든 화교가 그렇게 돈을 번 것은 아닐 테지만,
그러다가 1997년 태국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도 예외 없이 몰아쳐 들어왔다. 인도네시아 통화 루피아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는 걷잡을 수 없었다.
97년 말에 나는 자카르타를 방문했었는데 내가 왔다는 소식이 자카르타에 있는 한국친구들에게 전해지면서 모두가 몰려왔다. 하릴없이 투자상담을 하면서 지내는 신사장, 카시미르 이불 원단을 생산하는 회사의 월급쟁이 사장을 맡고 있는 최사장, 수마트라 도로공사 현장에서 데려온 현지 여자와 함께 건강보조식품 스쿠알렌을 한국에서 보따리로 가져와서 팔고 있는 박 아무개, 종합건설사의 현지지사장 이 부장, 또 누군가 두세 명이 더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잘 안 난다. 모두가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동료들이다. 신사장은 나보다 5년 이상 사회선배가 되는 분인데 내가 있던 건설회사의 인도네시아 지사장 출신이다. 이분은 정말로 인도네시아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도네시아 현지 말도 잘한다.
자카르타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하고 왔노라 하고 전화를 드렸는데 금방 달려와서 내짐을 챙겨 자기차로 옮겨 싣고 자기 집으로 갔다. "내가 기분이 나빠하는 걸 아실까?"
항상 골이 나 있는 듯한 특이한 표정의 신사장이 힐난하듯 툭 던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신사장집이 모두 모이는 캠프가 되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모여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나한테 고맙다고 하는 건 무슨 상황인가? 골프도 같이 치고 밤마다 화투놀이를 했다. 내기 골프에서 잃은 돈이 5십만 루피아, 화투 고스톱으로 딴 돈이 백오십만 루피아, 내가 모두의 돈을 전부 땄고 그 이튿날도 내가 다 땄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실제 내가 잃고 딴 돈은 그것을 10으로 나눈 것의 원화 가치일 뿐이다. 루피아가 졸지에 그 지경이 된 것이다. 외환위기로 돈의 가치가 그 모양으로 떨어졌으니 국민들 삶이 어떠랴?
내가 다녀온 후 불과 몇 달 후인 98년 5월 초 드디어 대학생들이 수하르토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렸다.
데모가 기름에 불을 붙인 듯 급속히 번져나가는 조짐을 보이자 수하르토는 중국인에게 총구를 돌리도록 사태를 교묘하게 조장하였다.
3% 밖에 안 되는 화교가 85% 에 달하는 경제력을 가지고 현지인의 고용을 좌지우지하는 중국인에게 화살을 돌리게 하니 부자 중국인에게 쌓여있던 불만이 그대로 표 줄 되어 데모대는 중국인 상점들을 공격하고 약탈, 방화를 감행했다.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수마트라 북쪽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메단 등지에서도 중국인 공격이 심하게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현지인이 그 와중에 사고로 만여 명이 죽었고 화교는 의외로 천여 명 정도였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집단 강간을 당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범접할 수 없었던 중국 여자에 대한 복수였던가, 아니던가, 하여튼. 중국의 장쩌민은 중국인 구출에 소극적이었다. 내정간섭이라는 것이다. 대신 중국인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싱가포르가 공군수송기를 동원하여 중국인 구출에 나섰다. 많은 중국인이 싱가포르로 피해 갈 수 있었고 그중의 상당수가 그냥 싱가포르에 눌러앉았다고 한다. 돈 많은 중국인을 눌러 있게 하였다면 싱가포르에게는 도움이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수하르토는 감당하기 어려워 32년의 긴 독재정치를 마감하고 하야했다.
그는 20세기에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불명예의 정치인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지만 재임기간 중 인도네시아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면도 커서 국민들 중에는 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는 2008년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았다는 게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정서이다. 수하르토의 실각 이후 민주화 및 개혁의 와중에 중국계 화인의 사회 각계 진출의 변화가 왔다. 수하르토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돈벌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권과 유착하여 오히려 더 많은 부를 축적하여 오늘날 그들의 재력은 더 막강해졌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지난 98년의 중국인 공격으로 어렵게 된 사람들은 비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민주화의 새로운 정권은 생각을 달리해서 그동안의 중국인들에게 취했었던 불공정한 여러 조치를 완화했다. 중국 이름을 못 갖게 하고 말을 못 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인도네시아의 100대 부자의 79%가 화인이고 상위 10대 부자의 9명이 화인이라면 그런 현상이 올까 봐 내렸던 정책들이 무슨 소용이 있었나? 부동산, 금융, 제조, 대규모 농업이 그들 손안에 있다. 또 이들 3세는 IT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 이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구처럼 2019년 총선에 많은 화인들이 정계에 진출했다. 후지엔(福健) 출신이 화인의 50%가 되고 나머지는 광뚱과 하카(客家) 출신 인 이들은 지금 중국의 푸통화(普通話), 만다린을 배우는데 열심히라고 한다. 경제대국이 된 중국과의 통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어떤 자료에서 다음세기의 경제강국을 예측한 것이 있었는데 인도네시아가 세계 2위의 강국이 될 거라고 했다. 그 예측이 맞는다면 분명 현재의 인도네시아 화인들의 역할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