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무결하지 않아 다행이야, 오르페우스

뮤지컬 하데스타운이 보여주는 어디에나 있는 사랑 이야기

by 최샬럿

대학교 2학년 때인가, 음대생에 동경을 가득품은 상태로 음대 교양 수업을 신청한 적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선정해서 어떤 형태로든 작품으로 창작해 내는 조모임 수업이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 조에는 음악과 악기에 조예가 깊은 공대 오빠 세명(비록 음대생 오빠는 아니었지만)과 졸업이 필요한 작곡과 언니가 한명 있었다. 공대 오빠 세명은 서로 아는 사이였고, 마치 미리 준비해온 듯 우리의 작품이 될 이야기를 제안했는데 그건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였다.




하데스가 있는 지하세계로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간 뮤즈의 아들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에우리디케를 지상 세계로 데려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조건은 절대 땅 위로 올라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것. 뒤따라 걷는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상으로 발을 딛기 직전, 그녀가 뒤에 따라오고 있는지 믿지 못한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서 잠자코 걷고 있던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눈 앞에서 다시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빨려들어갔다.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도 설렜지만, 작품을 발표하는 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작정한 듯 세명의 공대 오빠들은 드럼과 기타, 현악기와 스피커까지 직접 가져와 교실 앞에 깔고 공연을 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음대생이었던 언니는 작곡해온 배경음악을 깔아줬다. 나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나레이터를 맡았다. "그리고 오르페우스 그의 눈 앞에서 에우리디케는 사라지고 말았다."였던가, 그 엇비슷한 마지막 대사와 함께 드럼의 떨리는 사운드가 끝나고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고 있던 같은 수업의 학생들을 바라 보았다.

작품을 끝낸 우리를 바라보던 다소 당황해하던 교수님과 학생들의 눈빛이 여전히 생생하다. 쟤넨 뭔데 이렇게까지 진심이지? 하던, 잘했네라는 느낌을 넘어 어쩌면 질렸다라는 표정, 그리고 다음 순서의 발표를 걱정하는 옆 팀의 불안한 눈빛. 작품이 시작하기 전 악기를 세팅할 때부터 대체 뭘 보여주려고 저렇게 준비해온 걸까, 라고 뜨악하던 그들의 표정까지. 의심의 여지 없는 A+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학교를 다닌 5년 동안의 조모임 발표 순간 중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잊고 있던 이야기를 뉴욕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만났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사실 그 전에는 관심도 없던 작품이었으나, 뉴욕에 사는 친구가 티켓 로터리가 당첨되었다며 함께 보러 가자고 하여 그제서야 줄거리를 찾아봤다. 어, 나 이 걸로 대학생 때 공연했었는데. 그 때 그 오빠들이 미국에서 성공했나 ㅎㅎ 하고 농담처럼 10년 넘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가 무섭게 작품에 매몰된 나는 마지막엔 눈물을 뚝뚝 흘리다 나왔다. 새롭게 만나는 사랑이야기였다. 얼마나 벅차고 가슴이 뛰던지- 마치 열여섯살에 처음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본 직후의 그 충격적인 느낌이랑 비슷했다.



그제서야 한국에서 하는 뮤지컬 하데스 타운 작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기다리지 않아 샤롯데 씨어터에서 재연을 올린다고 했다. (이미 초연은 코로나 시절에 지나가버렸다.) 캐스팅을 찾아보니 팬텀싱어에서부터 좋아했던 조형균, 박강현 배우가 오르페우스를 연기하고 심지어 젠더프리 헤르메스 역할을 최정원배우가 맡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봤던 헤르메스는 중년 흑인 여자 배우였기에 사실 나한텐 이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노래의 선율이 충격적으로 좋았기에 매일 오리지널 캐스트의 앨범을 들으며 한국 공연을 예습했고, 한 캐스팅도 놓치기 싫어 벌써 세번이나 공연을 관람했다. 매번 볼 때마다 캐릭터들의 조화와 넘버에 감동하고(어떻게 이런 멜로디를 써낸거지? 작곡가는 진짜 오르페우스의 현신인가), 2막에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난다. 운명의 세 여신을 보며 조모임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세 명의 공대오빠들을 겹쳐서 떠올려보고(그들이야말로 운명의 세 여신처럼 내 대학생활에 갑자기 개입한 은인 아니었나,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이야기를 끌어가는 헤르메스를 보며 내가 맡았던 나레이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좀 더 잘해볼걸). 내가 이 작품을 만나게 된건 이미 10년도 더 넘게 전에 정해졌던 운명이 아니었을까라는 오묘한 상상과 함께.




뮤지컬 하데스타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헤르메스처럼 전지전능하지만은 않은 신과 에우리디케, 오르페우스처럼 나약하지만은 않은 인간의 이야기여서 좋았다. 지상에 있는 페르세포네를 약속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지하로 데려오는 것이, 그녀를 위해 지하에 공장을 더 짓고 전선을 까는 것이 왜 사랑이 아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데스, 자신의 왕국의 질서가 무너질까봐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한 청년과 연인을 쉽사리 돌려 보내지 못하고 두려워 고민하는 하데스. 땅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술에 취해 즐기는 것 외엔 할 수 없는 페르세포네. 반면 봄을 불러오는 노래를 쓰는데 몰두해 있는 연인을 방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 하데스 타운으로 걸어들어간 에우리디케. 다소 늦었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 망설임 없이 지하세계를 따라 들어가고, 하데스 뿐만 아니라 지하 세계의 일꾼들의 마음까지 움직인 오르페우스.


그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완전무결하지 않아서, 꽉 닫혀 있지 않아서 위안이 되었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사랑 - 그 것은 비극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결함이 가득하기에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랑 이야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랑 이야기. 그렇기에 우리는, 완벽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할 수 있고, 이번엔 다를 거라 믿게 되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어딘가에 있을 오르페우스가 - 가난했지만 베푸는 재능이 있었던 청년,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사랑을 약속했으면서 추위에 굶주림에 떠는 연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상에만 몰두했던 남자,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하 일꾼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을 따라오게 만들었으면서 끝까지 믿지는 못했던 젊은이. 사랑을 믿으면서도 자신을 믿지 못했던, 이상을 꿈꾸지만 의심을 버리지 못했던, 강인했지만 동시에 나약했던, 그래서 연인을 잃고만 가엾은 인간이- 너무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다시 돌아조면 그 모든 것은 동시에 에우리디케의 선택이기도 했다. 연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하데스 타운에 찾아가 일꾼이 되는 것도, 자신을 찾아온 너의 뒤를 따라 걸어가겠다 결심한 것도, 한발짝 뒤에서 걸어가며 자신의 운명을 너에게 맡긴 것도 결국 에우리디케 스스로가 오르페우스에게 걸어버린 희망이자 절망이 될 수 있는 도박이었으니까.

다만, 오르페우스가 결말을 알면서도 이번엔 다를 것이라 믿고 어딘가에서 다시 노래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걸음걸음마다 꽃송이가 피는 노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처럼 얼어붙은 사랑들을 녹이고 함께 춤을 추게 하는 노래, 봄이 오게 만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래를. 그럼 한 번 더 지하 장벽은 감동하여 에우리디케가 있는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문을 열어줄테고 다시 오르페우스의 눈에 에우리디케를 담을 수 있을테니. 누가 알까, 이번에는 정말로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는 오래 전 쓰여진 노래와는 다른 결말일 수도 있다는 걸.

아, 예술이 주는 대책없는 희망이 나는 정말로 좋다.-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