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살, 여자, 철 들...어야겠지?

34살에 찾아온 어른이라는 무게와 현실

by 최샬럿

나의 인스타그램 피드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매 년 떠나던 전 세계의 휴양지 - 그리스 미코노스, 하와이, 발리, 괌, 이탈리아 남부 중부 북부 아니, 유럽 전역... - 에서 찍은 사진들과 수많은 취미 생활 - 골프, 테니스, 발레, 요가, 필라테스, 쿠킹 클래스.. - 의 인증샷들, 미식가들에게 유명한 식당에서 열린 와인 모임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하다. 지인들과 친구들은 종종 "혹시 아직 회사 다니고 있는 것 맞아?", "한국에 살고 있는거 맞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너 인생 진짜 재밌게 사는 것 같아" 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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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년엔 어디를 떠나볼까, 이번에는 뭘 새롭게 해볼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한, 들뜨고 붕붕 떠있었던 시간에 나는 살았다. 솔직히 말해 워라밸과 보상 수준이 좋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에게 정신적 안정과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긍정적으로 기대해 볼 수 있으며 딱히 나 말고 누구를 책임져야 할 필요도 없는 내게 '미래'라는 것은 크게 걱정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 무슨일이 생겨서 큰일이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현재를 어떻게 하면 더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을까! 라는 다소 극단적인 가정까지 더해진 결과, 내 일상은 감사하게도 참 다채롭고 풍요롭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냉정히 말해 나는 '현실'엔 조금도 발붙이고 있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그렇게 둥둥 떠다니며 살던 내가 30대 중반에 접어든 어느 날, 묵직한 질문 하나가 내 머리를 때린다.


'나... 이제는 좀 철들어야 하는것 아닐까?'





하인리히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1건의 중대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29건의 경미한 사고가 있고, 그보다 앞서 300건의 이상 징후나 사소한 징후가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저 묵직한, 다소 무겁고 현실적인 질문이 내 머리를 후려치기 전, 사실은 하나하나 여기에 열거하기도 지난한 수많은 징후같은 일들이 내게 찾아왔고 이에 따른 질문들이 내 머릿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떠올랐다 없어지곤 했다. 특히 작년 연말은 최악이었다.


지난 해 12월, 무리해서 한번 더 떠난 발리 여행 첫 날 나는 바다에 새 휴대폰과 지갑을 몽땅 빠뜨렸다. 일주일 내내 이상 기후로 비가 하루종일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엎친데 덮친 사건이자, 나름의 축복이이었을까? (발리에서 현금 100원이 부족해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 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한국에 들어오자 깨달은 더 최악이었던 점은, 6개월 전 휴대폰을 사면서 계정 연동이 꼬였는지 그 이후에 찍었던 모든 사진들이 휴대폰의 본체와 함께 모두 날라갔다는 점이었다. 그말인 즉슨, 내가 꽤 많은 돈과 노력과 시간과 열정을 쏟아 다녀왔던 작년 9월 2주간의 그리스 여행(생에 최고의 여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비롯해, 골프장에서 찍었던 사진들과 와인 모임의 사진과 그밖에 자잘한 여행의 사진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솔직히 다들 사진 찍으러 여행 가는거 잖아요?) 내가 경험한 것들의 흔적과 증거였던 이미지, 영상들이 저 인도양 바다에 수장되어 버렸다. 내게 남은 건 머릿 속에만 남아있는 기억과 경험이었다. 200만원 넘는 1TB의 새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보다 이게 더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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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와서 돈도 시간도 체력도 값비싼 사진들도 모두 잃은 이후로 여행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매년 같이 해외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이 "내년에 어디갈까?"라는 질문을 던져도 음, 글쎄. 라는 말로 시들하게 반응하게 됐다.


더불어 한국에 돌아오고나서 마주한 건 회사 이슈였다. 연말 조직 개편을 지나며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이 최종적으로 폭파됐다.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 규모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사업은 fade-out하고 조직은 아예 회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처음이라 충격적이었다. 기존 구성원들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조직에 흡수될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한국 대기업이라서 다행이지, 미국 기업이었다면 이미 해고되어 건물에 들어갈 수도 없었겠지. 그래도 지금까지 쌓아온 레퍼런스 덕분인지 나는 원하는 조직으로 간신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개인의 신변에 큰 변화가 있던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고 나니 일종의 허무주의가 찾아왔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생의 요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꽤나 대가리꽃밭의 인간인 걸 알게 됐다. (마침내!)



한 번 눈을 돌려 현실을 바라보고 나니, 뒤이어 수많은 고민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사는게 맞을까?' '40대에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여전히 이 회사를 다니고 있을까? 여기에 계속 남아 있는게 맞을까' '만약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면 뭘 준비해야 할까' '집? 그럼 자산을 어떻게 불려야 하는거지?' ...


그리고 현실에 발붙이고 미래를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는 주위의 친구들과 또래들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지금까지 알뜰하게 자산을 축적하고, 이 시드 머니를 레버리지 해서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결실을 보는 사람들이 꽤 많이 생겨날 시점이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자산 증식을 하기 위해 남편, 와이프와 함께 힘을 합쳤다. 성공적인 부동산 투자로 '반포'를 포함해 서울 주요 지역에 자가를 마련한 친구들이 생겨났고, 투자로 큰 돈을 모아 회사를 휴직, 퇴사한 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지인들의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떤 친구들은 새로운 커리어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유럽으로 MBA를 떠났다. 그렇게 각자 준비해 오던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난 갑자기 깨닫고 얼빠지게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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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행을 다니고, 취미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어른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고, 기회비용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내가 이렇게 갑작스레 현실을 자각하게 된 이유는 앞에서 말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비롯된 충격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계속 살던 대로 살다가는, 또 이번처럼 불의의 사건들을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다면 나중에는 쿨하고 멋진 삶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연한 소리다. 누구나 알 것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걸 나는 34살 먹은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다!!!



지난 몇 달동안 1) 굳이 철 들어야 할까? 라는 생각과 이젠.. 철 들어야겠지. 라는 생각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동시에 2) 흥청망청 별 생각 없이 즐기던 삶의 패턴을 버리고, 현실에 발 붙이기 위한 몸부림을 치다 3) 수많은 후회에 맞닥뜨리고 가르침을 얻게 된 나. 여전히 그 몸부림은 진행중이다. 책임감있고 후회없는 어른의 삶을 살기 위한 34살 여자 직장인 샬럿의 고군분투기. 앞으로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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