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온 회사의 위기,
인생의 위기를 맛보다

회사에 자아의탁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34살에 깨닫습니다

by 최샬럿

난 안정적이고 벌이가 좋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적어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는 듯 하다. 가끔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게 소속을 밝혀야 해서 '저 000 다녀요' 하면 다들 와 좋겠다~ 라고 얘기해주는 직장인데, 사실 이 곳의 가장 좋은 점은 어떤 위기에도 크게 휘청이거나 어려워지지 않는 산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직률도 낮고, 대기업임에도 정년까지 여유롭게 다니다가 퇴직하시는 분들도 많다.


그 말인 즉슨,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환경에 적응하여 안일해지는 동시에 이 평범하지 않은 조건들을 당연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말이다. 사실 누워서 침뱉기라 굳이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저 사람이 이런 대우를 받을만큼의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사람들(과 어르신)들이 꽤 많이 포진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재직 10년차에 가까워진 지금, 처음 입사했을 때의 나의 모습과는 엄청나게 달라져버렸다고 계속 스스로 생각했다. 어쩌면 더 멍청하고 게을러졌을 수 있겠다고, 종종 소름돋는 생각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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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이 거지같은 조직에 내가 남겨지다니!


사실 지난 몇 년간 회사에서 잘 풀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다른 기업들보다 팀 간, 조직 간 이동이 자유로운데, 나도 그 동안 자발적으로 꽤 소속을 여러번 옮긴 편이다. 기존 레거시 조직에서 몇년동안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는 것은 내가 선호하는 방향이 아니었기에 선택한 길이었는데 그 여러번의 이동의 결과가 딱히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쌓아 놨던 공을 빼앗기거나, 내가 원하지 않은 조직 개편에 맞닥뜨렸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보니 잔잔하게 회사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는 중이었다. 특히 작년에는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에 신물이 날 정도였다. 내가 있던 조직은 신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대가 높은 분들이 많았다. 이 회사의 영광의 시절을 겪어왔던 분들이라 자산이든 뭐든 걱정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여가생활처럼 회사에 오는 듯 했다. 직급도 없는 회사인데 불구하고 자기 연차가 높다고 나한테만 업무를 몰아주고 나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꼴보기 싫었다. 일은 정말 나혼자만 하는 듯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성장할 의지도, 급할 것도 없었다. 저러고 나보다 1.5배는 연봉을 더 받아가겠지? 하는 생각에 가슴에 불이 났다. 왜 이렇게 나이먹고도 양심없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다 보면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나도 같이 휩쓸려갔다.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지않는 일을 나 혼자만 열심히 하는게 억울했다. 그렇다고 내가 평가를 정말 뛰어나게 잘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면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다. 식견도 좁아졌다.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몸이 편한 것에 익숙해져갔다. 그래서 이 조직에 있는 마지막 1년은 정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 나아가지도 못한 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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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그런 거지같은 조직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렇게 느슨해진 내게 경각심을 준 첫 사건은, 작년 중순의 일이었다. 회사에서 우리 조직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사업을 당장 종료하라고 했다. 꽤 충격적이었다. 사업 규모를 줄이는 것도, 조직을 이동시키는 것도 아니고 당장 사업을 종료하라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으나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일어나는 연말도 아니고 이 연중에? 대기업 치고는 꽤나 극단적인 전략이었다. 기존의 사업을 피벗팅한 신규 사업을 기획하라는 미션이 같이 떨어져서 해야할 일은 받았기에 조직 규모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안했다. 마케팅, 기획, 제휴 등 기존 업무의 선이 흐려지고, 워킹 그룹 형태가 되어 새로운 사업을 준비했다. 흠, 확실히 소속 구성원에게 딱히 좋은 표시는 아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당시 우리 조직은 전체 회사 구성원들의 주요 까대기 조직 중 하나였는데, 마침 겪은 우리 조직의 비보를 같은 회사의 구성원들은 블라인드 앱에서 신나게 떠들어대고 조롱해댔다. 자극적인 익명 앱 자체의 특성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누군가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처음 알았다. (당신들의 사업부도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는 것을...쯧쯧) 드디어 한심한 그 사업이 없어졌다나? 거기 사람들은 사실 다 정리해고 해버려야 하는데 자르지 못해서 아깝다는 말도 꽤 있던 것 같다. 그 때 처음으로 느꼈다. 아무리 내가 이 조직에서 스스로 제일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밖에서는 나를 내가 싫어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아저씨들과 비슷한 존재로 보겠구나...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나는! 회사에서는 이 조직의 명성이 결국 나의 명성과 동일하게 가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의 깨달음은 당시 회초리처럼 내게 다가온 셈이다. 안일했던 나의 회사생활에 변화를 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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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그런 거지같은 조직이 '진짜로' 사라진다면?


급작스런 변화가 찾아 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마자 우리 조직 자체를 해체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정말로 회사는 우리 사업부를... 폭파했다. 우리 조직의 인력은 다른 사업부로 흡수된다고 했다. 다들 설마설마 하던 일이었다. 규모를 줄여서 작게 진행을 한다거나 하는 수준은 예상했으나, 정말 사업부 해체라니!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었는데, 그게 내게 닥친 사건이 되었다. 몇개월이라도 준비하던 신사업까지 드롭하고 조직을 해체시킨다니, 그럴거면 왜 시킨거야? 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게 우리 조직의 사람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전쟁에서 함락당한 도시의 피난민이 된 기분이었다. 다른 사업부로 흡수된다지만 사실 거기서 대규모로 들어오는 우리를 반길리 만무했다. 사실 내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사업부였다. 가만히 있다가는 내가 원하지도, 나를 원하지도 않는 곳에 그냥 눈칫밥먹는 구성원으로 갈 판이었다. 커리어가 다 뭐냐,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라고 하는 말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맞는 말이다..) 원래도 조직을 옮길 생각이긴 했으나, 기존 조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이동하는 그림과 기존 조직이 사라져서 받아달라고 부탁해야하는 그림은 꽤 서로에게 다른 느낌일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좋게 봐주셨던 리더분께서 가고 싶었던 조직으로의 러브콜을 보내왔다. 이동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이 많기는했으나 결국 조직 이동에 성공했다.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다시 회고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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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뉴스에서만 보던 외국계 빅테크의 정리 해고와 같은 레벨의 사건이었다. 메타와 같은 기업에서 해당 사업부가 사라지면 개인의 실적, 성과, 평가 결과와 상관없이 소속해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리해고 된다. 외국계 기업이었으면 나는 이미 해고처리 됐을 것이다. 그 어떤 경쟁력도, 준비도 없이 멍하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취업 시장에 다시 내던져졌을 수도 있었다. 아찔했다. 대기업인게 처음으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감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렇게 이 안에서 안분지족하며 안일하게 살아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이 폭파되는 것처럼, 내 소속이 흔들리는 일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안정적인 직장에서 회사생활을 하다보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내 직업은, 내 앞길은, 내 소속은 내 능력을 키움으로써 스스로 지켜내야 한다. 더 발전하고 나아가야 한다. 오케이, 새 팀에서 그렇게 해보자! 다행히 적어도 회사가 없어질 일은 없을테니까!




Chapter 4. 근데 이제 조직이 아니라... 우리 회사가 사라진다면?


새 조직은 만만치 않았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이 전 조직보다 훨씬 더 많은 산업 인텔리전스와 인사이트가 필요했고 거시적이고 입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배우는 것도,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일이 터졌다. 굳이 말하지는 않겠으나, 우리 회사의 과오로 인해 국가적인 규모의 위기가 거론됐다. 시장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했고, 궁금해 했고, 그러다 자초지종을 알게된 후엔 분노했다. 아마 이 회사가 생긴 이래로 가장 심하고 강력하게 고객들에게 욕을 들어먹은 사건이었을것이다. 심지어 그냥 욕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고객들은 경쟁사로 움직였고, 회사 실적에 직접적으로 큰 구멍이 생겼다. 수습을 위해 회사에서 관련없는 모든 부서의 사람들까지 전국으로 지원을 나갔다. 아니, 어쨌든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이니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런 우리에게, 나에게 사람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도 궂은 말들을 쏟아냈다. 이런 싸가지 없는 기업은 사라져야 한다는 둥, 맘같아선 당장 폐업 처리를 해버리고 싶다는 둥, 그럴 줄 알았다는 둥 고객들은 맺힌 것이 많은 듯 했다. 지원을 나간 직원들 눈앞에서 눈 앞에서 저주를 퍼붓고, 화풀이를 하고, 사진을 찍겠다고 하고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래,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우리 회사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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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를 당장 수습하는 것은 둘째치고,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고객 보상부터 과징금, 과태료, 행정처리까지 회사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당장 망하지는 않겠으나, 기업의 존재 가치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인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안정감이 와르르 무너진 셈이었다. 그 경험을 하고나니 더 이상 지금 있는 회사에 내 자아 의탁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의 충격이 있어야 깨닫는다니...) 지금까지 회사를 너무 쉽게 다닌 것은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너네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직을 생각하다가도 그래, 이런 곳이 어딨냐? 하고 맘을 고쳐먹은 것이 수십번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안주하는 삶을, 점점 더 멍청해지는 길을 택하고 있었다. 말로는 더 나아지고 싶다면서 몸과 머리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점점 더 경쟁력은 사라지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잃고 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역량과 능력, 경험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괴로움과 싸우고, 하기 싫은 것을 이겨내고 해내고, 눈 앞에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얼마쯤은 포기해야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순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서 나의 일상을 위협할 지 모르니, 그럴 때 후회하지는 않아야 했다. 아마 이 반복되는 일련의 시간과 사건들이 나를 깨어나게 한 것은 분명했다.




스스로 철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외부의 거시적인 흐름이 나를 그렇게 흘러가게 한 셈이다. 고마웠다. 여전히 우리 회사는 위태롭다. 아직 나도 무엇을 어떻게 잘 해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평소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씩 하고 있다. 책을 읽고, 관련 업계의 기사들을 찾아보고, 끊임없이 리서치하고,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영어를 공부하고 링크드인을 업데이트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엇인가가 휙, 180도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을 자각하고 시작했다는 것이 어디인가. 시작이 반이라는데. 이제 시작했으나 나는 반이나 왔다. 이제 반만 더 가면 된다. 서른 넷, 이제 다시 시작이다! -fin.-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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