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너에게 가서 닿지는 않길 바래
그런 날이 있다. 며칠 동안 회사에서 나한테만 일이 꽤 많이 몰렸는데, 어찌어찌 정신 차려보니 나만 남고 거의 모든 사람이 다 퇴근해 버린 날. 시계를 보니 열시에 가까워져 있다. 퇴근하면 조명이 나가도록 연결해 놓은 자리는 이미 불이 꺼져 드문드문 어둡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분위기가 어색하고, 딸깍이던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가 조금은 멋쩍어 일을 멈춘다.
바빴던 지난 며칠동안, 여러가지 이유와 사건으로 스스로가 생각보다 별것 아닌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하게 됐다.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게 차곡차곡 쌓여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이유로 그냥 내가 싫어졌다. 다시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아까 허겁지겁 먹은 햄버거가 잘 소화가 안되고 얹히는 것 같다. 그냥 컵라면을 먹을걸 그랬나. 어차피 그게 그거지 뭐, 둘다 건강엔 안좋은데 뭘. 잠시 의자에 기대 눈을 감는데 햄버거랑 컵라면을 비교하는 내 자신에 대해 미약한 초라함을 느낀다. 미묘한 외로움이 갑자기 마음을 덮는다. 아, 이젠 집에 가야지.
한번 빠져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뭐라도 껴안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면 어떡해야 할까,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수다라도 떨까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는다. 이런 날일 수록 주위 사람들은 특히 더 바쁘다. 갑자기 카톡으로 다음 주 월요일에 하와이로 떠나는, 며칠 남지 않은 여행 계획을 짜던 친구가 말을 걸어온다. "거기 식당 좋은데 있어?"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준다. 부럽다는 말도 잊지 않고, 너무너무너무너무 좋겠다고 호들갑을 떤다.그래, 다들 각자의 일로 바쁜데 별것도 아닌 나의 외로움을 토로해서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다. 이건 그냥 내 하찮은 외로움이니까.
회사 로비로 나오니 어느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나 우산 안가져왔는데. 자리에 우산도 없는데. 아까 비 안올때 갈걸 그랬나. 로비 안내 데스크에 계신 분에게 회사 우산을 빌릴 수 있냐고 물어본다. 이미 다 나가서 빌려줄 수 없다고 한다. 한 발 늦었구나. 버스 정거장까지 맞고 가기엔 너무 굵은 비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택시비가 떠올랐다. 이미 할증이 붙는데... 오늘 내가 뭘 했다고 택시까지 타냐. 그냥 비를 맞고 갈까, 하는 찌질한 생각을 한다. 햄버거냐 컵라면이냐, 되게 하찮은 걸 가지고 꽤 깊게 고민했던 나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 순간 회사 우산을 쓰고 들어오는 가드분이 로비에 우산을 반납한다. 잽싸게 다시 가서 이건 빌려도 되는거냐고 물어보니 이건 빌릴 수 없는 고장난 우산이라고 한다.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집에 갈 기력도 안생긴다.
택시라도 타지 않으면 그냥 너무 오늘의 마무리가 우울할 것 같아, 카카오T를 켠다. 비도 오고 피크 타임이라 택시는 잡히지 않는다. 몇번이고 호출을 해보고, 우버 앱도 켜보고, 다시 창밖에 비가 그쳤는지를 확인한다. 짜증나게도 하나도 안 잡힌다. 20분간의 사투 끝에 겨우 멀리서 오는 택시 한대가 잡혔다. 짜증보단 감사함이 앞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택시에 타서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이 기분이 아래로 무거워진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 별 것도 아닌 것들로 내가 스스로 초라해 보이는 날이. 모든 것이 날 혼자 내버려 두는 것 같아 외로운 날이. 하지만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냥 버티는 것이다. 이 초라함이 알아서 지나갈 때 까지. 어른은 굳이 남을 붙들고 하소연할 필요도, 어리광을 부릴 필요도 없는 법이다.
...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정정하겠다. 사실은 붙들고 하소연하고 어리광을 부릴 사람이 없다는게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다들 너무 바쁘다. 지금 이순간도 크고 작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내 하찮은 외로움과 슬픔을 공유하고 이해받기에는 나 스스로도 부끄럽다. 그럴 나이는 이제 지났으니까.
그래서 그냥 홀로 더 깊이 가라앉아본다. 아까는 미웠던 빗방울이, 비내리는 날씨가 이제는 조금 고맙다. 유일하게 날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에어팟에서 나오는 슬픈 노래 때문인가, 눈물이 찔끔난다. 창밖이 꽤나 시끄러워서 다행이다. 하품을 해서 눈물이 난 듯이 괜히 가짜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빈다. 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다.
택시 아저씨는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굳이 5m 앞에 있는 가림막있는 정문 앞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는 길에 나를 세워준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그 몇초의 순간도 서러운데, 딱히 슬프다기엔 어중간하다. 차라리 엉엉 울 수있는 사건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 진다던지, 차가 물을 확 튀기고 간다던지, 가방을 흙탕물에 떨군다든지, 그냥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울고 이 감정을 털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일.
하지만 그렇다기엔 가로등에 비치는 빗줄기는 아름답고 빗소리는 시원하고, 집은 고요하고 별 일이 없다. 어쩌면 오늘 이 감정은 잠들기 직전까지 오롯이 나랑 함께 하려나보다. 어서 자야겠다. 힘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