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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May 05. 2021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육림고개의 초보 사장님들


흐린 날이었다. 주중에 나의 동선은 정해져 있다. 집, 첫째의 초등학교, 아내의 회사, 둘째 유치원을 베이스 아이들 하교 후에는 춘천 시립도서관, 국립 춘천박물관, 소양도서관, 롤러스케이트장 그리고 마트 3곳을 동선에 맞게 이용한다. 매번 가는 곳만 가게 되어 지루할 수도 있는 일상이다. 그래서 마침 다른 볼일이 있어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혼자 어디를 갈 일이 있으면 최대한 여유롭게 그 근처를 둘러보려고 한다. 자녀의 계좌 개설을 위해 시청 근처의 은행에 갔었다. 볼일이 끝나고 시간이 남아 근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춘천 구시가지의 중심이었던 육림고개에 올랐다. 춘천에 이사 오고 나서 두어 번 왔던 적은 있지만 지나가기만 한 길이었다. 이번에는 좀 천천히 거리를 음미해보기로 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더 이상의 효용가치가 없던 낡은 건물들에 몇 해 전부터 젊은 청년 사업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청년 사업가들이 시의 지원을 받아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식당, 카페 등을 오픈했고 지금은 춘천의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춘천을 소개하는 관광책자에도 육림고개는 주요 관광지로 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평일 오전 시간. 그것도 흐린 날이어서 육림고개의 모습은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아니 볼품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을 듯싶었다. 아직 오픈 전이라 굳게 문이 닫힌 가게들로 거리는 쥐 죽은 듯한 고요함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두어 군데 공사장에서 흡연을 하고 있는 인부들 몇 사람만 눈에 띌 뿐이었다.




그나저나 배가 고팠다. 시청에서 이쪽으로 나오는 길에는 아침일찍부터 문을 연 부지런한 가게들이 더러 있었지만 육림고개는 모든 가게가 열한 시는 넘어서 시작한다.

'먹고 올 것을.' 후회해봤자 늦었다. 귀찮게 왔던 길을 돌아갈 바에 굶는 쪽을 택하겠다. 볼 것 없던 고개를 넘어 시장 쪽으로 넘어왔다. 주로 의류 원단을 파는 소매업자들이 빼곡히 자리 잡은 넓은 건물 한편으로 시장이 이어졌고 드디어 문을 연 식당이 보인다. 바깥에서 확인한 메뉴는 선지 해장국과 쇠고기 해장국. 나쁘지 않겠다 싶어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장사를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되었다고 하는 여자 사장님은 넉살이 좋았다. 가게는 정돈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식기며 조리도구들이 무질서하게 엉켜있었고 밥은 전기밥솥에 취사 상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선지를 다 식어버린 커다란 에서 작은 냄비로 덜어내 다시 데우는 일련의 과정이 내가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노출되었다. 누가 먹던 것일지도 모를 선지 해장국이 신경 쓰였지만 초보 사장님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은 계속 말을 걸었다.


이 시간에 어떻게 혼자 다니는 것이며 다른 곳에서는 1인분은 해주지 않아서 들어온 것이냐며 혼자 온 손님을 어색하지 않게 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도 어차피 들어온 것, 기분 좋게 먹고 가기로 마음을 고쳤다. 내가 춘천에 이사 온 지 2달밖에 안 된 이방인이고 춘천에서 직장을 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자 춘천의 장점에 대해서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나도 궁금했던 차, 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했다. 춘천에서 사는 것에 대해,  왠지 시장통의 아주머니 사장님께 듣는 정보가 건질게 많을 것도 같았다. 선거 때마다 전통시장을 찾아 민심을 확인하는 정치인 마냥 춘천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들은 얘기 중 주목한 것으로는 강원도의  타 지역에 비해 이방인에 대한 텃세가 그나마 별로 없다는 것과 시민들 중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종사자가 많아 대체로 워라밸이 좋다는 것. 또한 그에 따라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좋은 차를 타고 비싼 브랜드의 옷을 입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주거니 받거니 재미있게 이어졌지만 선지국은 맛이 정말 별로였다. 맛으로나 비주얼로나 어디 하나 소구 하는 포인트가 없었다. 김치와 깍두기도 수입산에 싱싱한 느낌이라곤 없이 구색만 갖춰놓은 꼴이었다. 그제야 사장님을 찬찬히 뜯어보니 왠지 음식장사를 해왔던 분 같지는 않다.


잠깐 동안의 이야기를 나눈 정으로 솔직하게 이렇게 하시면 어려울 것이라 직언을 해줘야 할지 아니면 묵묵히 한 그릇 뚝딱 비워내는 것으로 무언의 응원을 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들어온 노부부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선지해장국을 주문할 때는 만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계산을 할 때 몇천 원짜리 국밥이니 호기롭게 현금결제를 요청하는 배짱도 가지지 못한 초보 사장님이 얼른 상황을 파악하도록 마음속으로 빌었다. 요즘 이런 허름하고 지저분한 시장 구석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아 장사가 어렵다는 사장님의 푸념에 '맛있으면 옵니다'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식사를 마치고는 갈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근래에 춘천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 검색을 많이 했는데 그중 우연히 눈에 띈 것이 나처럼 서울에서 최근에 이사 온 누군가가 춘천에 북카페를 차렸다는 소식이었다. 나도 살던 곳의 동네책방의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 관심이 생겨 육림고개 근처에 위치한 그곳을 한번 들러볼 심산이었다. 고개의 메인도로에서 살짝 벗어난 주택가에 자리 잡은 그곳엔 북카페 특유의 감성적인 공간의 느낌이 가득 차 있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북카페는 운영방식이 특이했다. 음료값이 아닌 공간 이용료를 받는 건 그렇다 치고 한쪽에 딸린 게스트하우스로 이용하는 방 하나의 숙박료를 5년 뒤에 돈이 아닌 물건으로 받는다는 것이나 누군가의 창작물을 마진 없이 판매 대행해주는 등 경제적인 논리로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오래된 주택을 리모델링하는 데 돈이 꽤 많이 들었을 텐데 그만한 수익을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라테 한잔을 시키고 책을 둘러보다 여사장님과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우리와 비슷하게 춘천으로 이사를 왔고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인 것도 같았다. 북카페 운영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크게 장사에 목적을 두고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역시 부부의 인상과 말투를 찬찬히 뜯어보니 장사와는 거리가 먼 순수함이 가득 찬 모습이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까지 깊은 대화가 이어지진 못했지만 춘천에 이런 곳이 생긴다는 게 반갑긴 했다. 부부 사장님이 초심을 잃지 않고 또 사람들이 좋은 취지에 공감하여 북카페가 원활하게 운영이 되기를 바랐다.




자영업 내지 장사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나도 30대 중반까지 누군가 꿈을 물어보면 남미에서 여행객 상대로 민박집을 차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그 꿈이 실현되기는 어려워졌지만 다른 뭐라도 내 일을 직접 해보는 것은 여전히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인생의 목표이다.

오늘 만난 두 곳의 초보 사장님들도 각자의 목적에 맞게 모든 일이 잘 되시기를, 잠재적 자영업자로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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