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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 Dec 16. 2020

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있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고

이 책이 너의 인생 책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집었어. 나는 무언가에 ‘인생’이라는 말을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인생 영화, 인생 책, 인생 여행지 이런 말 있잖아. 아직은 내 인생OO이라 이름붙일 만한 무언가를 만나지 못해서이거나, 설령 그것을 만났다 해도 언젠가 더 강력하게 나를 뒤흔들 무언가를 위한 자리를 남겨놓는 것 같기도 해. 예전에도 네가 나에게 이 책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나. 그럼에도 이제야 책을 읽게 된 건 그때와 달리 나는 내가 많이 얄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이 책이 나의 가난한 마음을 조금은 채워주길 바라면서 읽었어.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궁금해졌어. 네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었을지, 이 책이 어떻게 너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을지 궁금해.


눈앞에 있는 것들이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느껴진 적 있어?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예쁜 옷을 입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기분 말이야. 좋지도 싫지도 않은 상태. 감각을 느끼는 신경의 일부가 사라진 기분. 잠깐이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어. 그 때 나는 이런 기분이라면 죽어도 상관 없겠다고 생각했어. 죽는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 같지 않았어. 나는 아주 잠시 느꼈던 이 기분으로 베로니카는 꽤 오랫동안 지냈던 것 같아. 눈에 뻔히 보이는 삶이어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불행하지도 않은 채로 그녀는 살았어. 사실 그것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건 자신이었음을 모른채 말이야.


하지만 선택의 결과로서의 죽음이 아닌, 죽음이 닥쳐버린 상황에 놓여진 후에야 그녀는 알아. 그녀가 얼마나 변화를 만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는지. 그딴 바보짓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예측 가능해졌는지 깨닫고 증오해. 그녀 자신과, 그녀의 부모와, 그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느끼고 증오해. 과거의 자신을 혐오하고 후회해. 하지만 그 반응은 결국엔 사라져. 분노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증오가 소진된 자리엔 대신 사랑이 채워져. 그녀는 달을 위해, 별들을 위해, 정원과 산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그리고 에뒤아르를 만났지. 


짧고도 길었던 일주일 후, 그녀는 죽지 않았지만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태어났다고 느꼈어.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노인에게 죽빵을 날리고 정신분열증을 가진 남자 앞에서 자위를 하기 때문이야. 그것은 이제 그녀가 참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았어. 무감각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느끼고 원하고 반응하고 있었어. 그러는 동안 그녀는 완전히 살아있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용감해지고 자신도 몰랐던 또다른 자아를 발견해. 어쩌면 사람은 천성적으로 수동적인 동물인 것 같아. 죽음, 마감, 데드라인이 있어야 움직이니까. 끝이 있기 때문에 절대 해낼 수 없을 것 같던 일들을 해내기도 하고.


갑자기 일주일밖에 못산다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나라면 처음에는 너무 슬퍼서 아무것도 못할 거야. 그렇게 가만히 누워 죽는 날만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할거야. 그렇게 멍을 때리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들겠지. 이럴 때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집밖으로 나갈 것 같아. 잠깐의 절망 후, 나는 주어진 일주일을 있는 힘껏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쓸거야. 매순간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려고 애쓰겠지. 안해본 미친 짓들도 막하겠지. 호치민에서 탔던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고 싶어질 것 같아. 그리고 하지도 못하는 수영을 하겠다고 바다속으로 들어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껴보고도 싶어.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거야.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잘 말하려고 애쓸거야.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고 말하고 눈을 감겠지.


종종 내가 너무 소중해서 내 주변의 것들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 내가 느끼는 감정, 나란 존재가 너무나도 크고 중요해서 타인의 존재는 되게 사소하게 느껴져. 제드카가 말한 미쳤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제드카는 ‘미쳤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좀 부끄러워졌어. 내 몸이 곧 빌레트인 것 같아서. 빌레트에서는 자신의 광기를 당연히 드러내고 아무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잖아. 그곳엔 미친 사람들뿐이니까. 그곳은 너무 편하고 아늑해서 담만 넘으면 나갈 수 있는데도 아무도 타인들이 사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지. 바깥은 그들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이고, 빌레트는 그들이 잘 아는 곳이니까 굳이 나갈 필요가 없는 거야.


하지만 뻔히 아는 세계에 산다면 결국 베로니카처럼 죽음을 결심하게 될거야. 과거의 베로니카도 빌레트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 바깥 세상에 살긴 했지만 미래가 뻔히 내다보이는 삶의 사이클에 갇혀 있었지. 하지만 죽음을 자각한 순간, 그녀는 달라져. 자신이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미지의 세계로 가. 몰랐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행복해. 물론 살면서 다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을거야. 


살아있는 동안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싶어. 내 안의 광기는 잠시 넣어두고 나를 둘러싼 미지의 세계를 잘 느끼고 싶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고 반응하고 싶어. 그러다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사랑을 하고 싶어. 사랑한다고 원없이 말하고 싶어.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살고 싶어. 언젠가 죽기 때문에 더 용감해지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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