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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원 Feb 13. 2024

인생은 고(苦)일지라도

조심히 끄집어 내보는 그 해의 공포(4)

 

 다음 단계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이  모든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큰 돌 두 덩어리를 마음에 얹은 채로 버텨나가고 있었다. 과연 이 모든 일이 끝나기는 할까? 옆반 아무개가 반항하는 일로 고민하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12월 초에 통보 공문이 오면서 마음의 돌 덩어리 하나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날이 드디어 왔는데 이상하다. 오랜 기간 움츠러든 채 경직된 몸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입꼬리 근육을 올리는 것이 이리 힘겨웠던가. 웃는 것도 영 자연스럽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니까. 큰 산은 넘었지만 아직 아버지 치료는 지지부진했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고, 한의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한약을 먹고 도움은 받겠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래도 원하면 한 재 더 지어주겠다고. 이제 와서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시나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비싼 약을 그래도 한 재 더 받기로. 여기서까지 안된다고 하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딱 하나 남은 동아줄이 끊어지는 심정이었다. 막막했다.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같은 병을 앓는 가족들의 카페에도 가입하여 이 분야에 일인자라는 병원과 교수님을 알게 되었다. 1월에 문의를 했는데 4월 초에 진료가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일단 예약을 해두고, 새 학교에서 담임을 맡아 정신없는 신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새벽 기차에 올랐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더 이상 실망하는 일이 없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J대학 병원 L교수님 진료를 받기 전,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여러 검사를 하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 너무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어요. 왜 치료를 계속 안 받으신 거예요?"

난 최선을 다해 알아보고 병원을 모시고 다녔는데,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닌데...... 그동안 대학 병원에서 받은 상처로 마음을 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면 듣는 둥 마는 둥 말을 다 잘라버리고 불친절했던 의사들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여기도 비슷할 거라 잠시 체념했던 마음은 감사하게도 착각이었다. 진심으로 다가와준 선생님들, 드디어 뵙게 된 교수님은 아버지 상태를 보고 깜짝 놀라셨다. 


"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실명 위험이 있습니다. " 


 L교수님은 일주일에 3일만 진료, 수술 예약은 2-3년 후에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스케줄을 조정하여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아주셨다. 한시가 급했지만 코로나 시기라 검사를 먼저 해야 했다. 음성 결과가 나오자마자 입원, 수술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눈 주위의 뼈를 깎고 눈동자 수술을 받는 아버지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 당사자인 아버지가 가장 힘드셨을 것이다. 잘 견뎌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처음으로 속내를 비추셨다. 수술 전날 밤 MRI 검사 기계에 들어갔을 때 공포심이 밀려왔다고. 하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애써줘서 고맙다고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갑상선 안병증, 사시, 백내장 등 여러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과 세 분야의 교수님들의 협진이 이루어졌고, 몇 차례의 수술을 더 받으셨다. 5월 연휴에는 서울에 숙소를 잡아 방사선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까지도 매달 치료를 받으러 상경하신다. 고생스러운 서울행이지만 예전 마음과 완전히 다른,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알 수 없는 병환만으로도 힘들었던 당시, 난 처음 겪어보는 사고와 그에 따른 징계 절차로 공포심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또 하나. 그 해 나를 스쳐갔던 이름 모를 경찰관, 검사, 그리고 교육청 담당 장학사님 모두 내 입장에 서서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이 분들까지 윽박질렀다면 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셨던 동료 선생님은 가까스로 하루의 책임을 끝내고 무너지는 날 잡아주셨다. 여자 휴게실에 데려가 전기장판 온도를 올리고 담요를 끌어다 무릎에 덮어주셨을 때 처음으로 아이처럼 두 다리를 차면서 울었다. 이 무조건적인 따스함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긴장을 녹여버렸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줄게'하는 표정만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친절한 태도는 사람을 살리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능력은 크지 않지만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무료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새겼다.







  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마치며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아직 극복이 안된 여러 갈래의 수치심과 조금은 후련해진 듯한 희미한 해방감을. 아직도 출퇴근 외에 운전은 힘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는 마음과 별개로 맏이의 부담감에 홀로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아픔을 살살 풀어내는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인생은 고(苦)일지라도 전보다는 더 성숙하게 나를 보듬어주고, 쓰다듬어 줄 마음의 근육이 자라지 않았을까? 오늘도 나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눈부신 존재들에 대해 떠올려본다. 내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마음씀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알기에.


 3년이 지난 어느 가을날, 업무 관련 연수에서 그 장학사님을 뵈었다. 이제 다른 부서의 장학관님이 되어 연수를 주재하시는 모습을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여러분 덕분에 온통 살얼음판이었던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을 맞이할 있었습니다.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따스한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뭐라 표현할 방도가 없을 만큼...'



그 시절 버스 안에서. 서울 가는 길의 새벽녘이었는지 내려가는 길의 저녁 노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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