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결심 하나
감정 표현에 서툴다. 그나마 나이를 먹어서 이 정도지만 여전히 잘 드러내지 못한다. 타인의 축하와 칭찬에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말 돌리기 일쑤고, 뭔가 불편하고 억울한 상황에도 널뛰는 감정을 두어 차례 가라앉히고 차분히 문의하는 바람에 나의 절박한 심경은 잘 전달되지 않곤 한다. 나의 이러한 성향에 익숙해진 동료들과 이별하고, 새로운 일터가 정해졌다. 이 지역으로 옮긴 후 세 번째 학교이다. 어쩜 곧 20년 차인데도 아는 동료는 늘 없고, 낯설고 불편할까! 새 학교 적응만으로도 버거운데, 인사 간 첫날 고등학교 한 곳과 중학교 한 곳에 겸임을 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예의 바른 말투였지만 업무, 겸임 가는 날짜, 연구실 자리 등 차가운 통보는 계속되었다. 이미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지만 담담하게 새 학기 전교직원 워크숍 날짜 안내를 들은 후 빠져나왔다. 바깥은 유난히 추웠다. 처음 와 본 동네의 눈길을 한참 걸었다.
작년 12월 만기자 내신 원서를 작성할 때, 점수가 나쁘지 않았다. 현임교에서 담임, 부장 점수를 잘 쌓아두어 나도 모르게 기대를 좀 하고 말았다. 나와 비슷한 경력이 되면 1 희망지로 발령이 나는 경우가 많았기에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과 1 희망지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들떠있었다. 한 학교에 한 명만 갈 수 있는 내 처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발표 후 동료들의 위로 섞인 안부 전화를 받았다. 한 동안 한탄하고 나면 스스로 추스르고 일어서던 내가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 커리어의 정점에서 시한부를 선고받은 이야기를 읽으며, 이 정도의 시련은 이겨내야겠지? 자문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대에 배부른 투정은 아닌가 돌아보기도 했다. 별짓을 다해봐도 도저히 괜찮아지지 않았다.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던 엄마가 식사를 차려줄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이불속으로 들어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으니, 아이들의 눈빛에도 염려가 스몄다.
매년 티오 감축 대상 과목이 되고, 내 과목을 콕 집어서 전과 대상자 공문이 날아와도 잠시 흔들릴 때는 있었으나 결론은 늘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내게 이 외국어 학문은 수능 성적을 맞춰서 대충 정한 전공이 아니다. 좋아하는 여러 외국어 중에 오랫동안 고민하여 얻은 내 인생 최초의 신중한 선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전공을 직업으로 연결할 수 있다니! 세상 물정 모르던 그 시절의 난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교사로서 안정적인 상태로 학생들과 더 나은 배움을 위한 새 학기 준비를 하는 것이 소원이다. 평안한 마음으로 수업 자료를 제작하고 연구하는 방학을 보내고 싶다. 이미 다쳐 조각나버린 마음을 겨우 추슬러 일어서는 일을 이젠 더. 이. 상. 하고 싶지 않다. 부쩍 전 같지 않은 내 체력과 소중한 시간을 더 이상 불안함과 불편함에 소진하고 싶지 않다. 조직 내, 위에서 내려진 결정에 따라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며 더 이상 마음 졸이고 싶지 않다. 또 어떤 마음을 억지로 먹고 일어서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 자신이 안쓰러워서 조금 울고 말았다. (실은 설거지하다 갑자기 꺼이꺼이 울었다.) 몸이 힘들더라도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열정을 되찾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꼿꼿하게, 의미 있는 삶을 채워나가고 싶다.
명확하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지만,
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찾는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