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봄도, 인생의 봄도 다가왔다.
1화. 봄이 다가오는
나뭇잎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질끈 묶은 머리카락도 한들거렸다. 루리는 봄이 코 앞으로 다가온 모습을 보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일자 앞머리에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의 끝은 어깨선에서 살랑거렸다. 한쪽 가슴에 하트 모양 자수가 있는 흰색 라운드 반팔티에 리넨 재질의 인디핑크 컬러 오버핏 남방을 걸치고, 색이 바랜 느낌의 청바지는 빳빳한 새 옷인 듯했다. 청바지는 발목 부분을 가볍게 접었고, 검정 스니커즈 발목 쪽으로 흰색 양말이 살짝 보였다. 한쪽 어깨엔 보라색 플리츠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무엇이 들어있는지 가방은 홀쭉하고, 오른쪽 팔로 전공교재로 보이는 두꺼운 책 2권을 받쳐 안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팔찌처럼 보이는 얇은 시계가 반짝였다.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루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침 수업은 없지만 조금 일찍 학교에 가서 전공서적을 읽을 계획이었다. 고등학교 때 화학 선생님을 좋아해서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화학의 매력에 푹 빠져서 화학공학과로 진학했지만, 어느 대학교나 그렇듯이 1학년한테는 심도 깊은 전공수업을 해주지 않았다. 과대표 선배에게 부탁해 전공서적 몇 권을 받았고, 100% 이해는 안 되지만 그저 읽기만 해도 흥미로웠다.
축축한 대리석 냄새가 나는 계단을 올라 양쪽으로 문이 늘어선 복도를 따라 쭉 걷다 보니 ‘화학공학’이라는 글자가 적힌 팻말이 붙은 문 앞에 도착했다. 계단에서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의 출처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루리가 아침 수업이 없는 날 혼자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싶을 때면 도서관이 아니라 과방을 찾을 정도로 과방은 조용한 곳이었다. 물론, 오전 한정으로 말이다. 이 시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소리를 들은 터라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도서관으로 갈까, 생각하는 찰나에 과방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아름이! 들어와!”
과대표 선배가 문을 열고 나오다가 루리와 마주쳤다. 루리를 ‘아름이’라는 대명사로 부르는 과대표 선배는 늘 스냅백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과방을 보니 과대표 선배 포함해 6명의 3학년 선배들이 모여있었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니 회의를 하는 듯했다.
“아니에요. 회의하시는 거 같은데 전 도서관으로 가면 돼요.”
“에이스 프로젝트 회의하는 거라 너도 옆에서 들으면 좋지.”
“에이스 프로젝트요?”
“그냥 옆에서 듣기만 해도 도움될 거야. 앉아.”
루리가 쭈뼛쭈뼛 문 앞에 서 있으니 과대표 선배가 루리를 과방으로 들이밀었다. 회의에 열중이던 선배들의 눈동자가 모두 루리를 향했다. 과대표 선배가 루리 뒤에 서서 선배들에게 이야기했다.
“1학년 아름이, 다들 알지? 우리 과 진짜 에이스가 될 녀석이야. 얘도 나중에 에이스 프로젝트 할 테니 같이 들어보라고 데려왔어.”
갑자기 선배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루리 뒤에서 우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리도 벌써 에이스 프로젝트 준비하는 거야?”
깜짝 놀란 루리가 뒤 돌아보니 학과장 교수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서 계셨다. 교수님은 185cm의 거구의 소유자였는데 머리는 베이비 펌으로 가볍게 말려 있었고 유행 지난 뿔테가 인상을 한결 순하게 만들었다. 다른 교수님들이 양복이나 카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반면, 학과장 교수님은 늘 청바지에 체크 남방으로 교수님이 대학교 다닐 시절의 패션을 아직도 유지하시는 것 같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간적이고 친근한 교수님으로 호감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루리도 미리 프로젝트 준비해 놔. 너희 선배들처럼 일주일 내내 주제만 고민하지 말고.”
교수님이 과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선배들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고, 루리도 책상 맨 끝 자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들고 있던 전공 서적을 책상에 내려놓고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책 위에 얹었다. 과대표 선배가 회의한 것으로 보이는 볼펜 자국이 빼곡한 종이를 교수님께 들이밀었다.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던 교수님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제로 웨이스트는 대놓고 환경 공학인데 어떻게 공학과 상관이 없는 팀이야? 지금 공대 대표로 나가는 녀석들이 주제부터 허접하면 어떡하니.”
“교수님, 근데 아시잖아요. 공학이라는 게 말이 공학이지 사실 우리 실생활에 공학이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맞아요. 연결고리가 0인 분야가 없다고요.”
“문학 이런 쪽 하고 융합하려니 공학과 문학을 어떻게 융합시켜요?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에이스 프로젝트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팀이 약간의 교집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거지. 0에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나오는 답은 하나잖아. 최소 1이나 2는 있어야 큰 수를 곱했을 때 숫자가 커지지. 처음부터 큰 수와 큰 수를 곱하라는 뜻이 아니야. 그건 이미 많아. 에이스 프로젝트가 창의융합 TF인데.”
답답한 마음에 속사포로 랩을 하던 교수님이 말을 끊고 고개를 살짝 돌려 선배들의 얼굴을 쳐다본다.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짧은 한숨을 쉰 교수님이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화학 공도들, 융합이 뭐지?”
“서로 다른 종류가 녹아서 구별이 없게 합쳐지는 겁니다.”
“물과 기름이 융합되나?”
교수님의 말에 루리는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마냥 눈이 동그래졌고, 입이 쩍 벌어졌다. 짧은 대화였지만 교수님과 선배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름 머리를 굴려 공학과 무관한 전공으로 찾아봤지만 너무 막막했다. 아마 선배들도 이렇게 막막해서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으리라. 그렇지만 물과 기름이 융합되냐는 교수님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띵했다.
“끓으면 융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식으면 다시 층이 생겨요.”
루리가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홀리듯 나온 대답이었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본인도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루리의 대답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선배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식으면 층이 생기니까 물과 기름은 융합이 아니라 그냥 합함으로 봐야지. 모래와 물도 흔들면 융합된 것처럼 보이는 흙탕물이지만 결국엔 모래가 가라앉지. 다양한 인재융합이 목표라는 에이스 프로젝트가 프로젝트 당시만 융합이었다가 이후 다시 분리가 된다면 그게 진짜 인재융합이야?”
“교수님, 제로 웨이스트 말고 친환경은 어떤가요? 태양열 같은 대체에너지요.”
“나쁘지 않긴 한데 그것도 에너지공학 분야잖아. 에너지 자체가 화학에서 다루는 개념인데 대체 에너지라니…”
한 선배의 제안에 교수님은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던 루리가 의자 끝에 걸터앉는 자세로 고쳐 앉으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혹시, 음악은 어때요?”
루리의 말에 선배들이 모두 집중했다. 주제넘는 참견을 한 건가 싶어서 약간 기가 죽은 모습으로 뒤로 물러나 의자에 기댔다. 하지만 선배들의 표정은 ‘제발 너라도 도와줘’ 하는 희망에 찬 표정이었다.
“음악과 어떻게 융합시킬 생각이지?”
교수님이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가져다 대고 몸을 앞으로 기대며 질문했다.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루리는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 자신감을 가지고 설명했다.
“음악과 공학은 서로 안 어울릴 것 같은 분야잖아요? 정통 클래식 음악 같은 경우야 악기 고유의 특성이 주를 이루지만 요즘 사용하는 일렉기타나 베이스 기타 같은 전자기타들은 공학으로 만들어 낸 악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현대 악기를 다루는 실용음악과나 아니면 밴드랑 팀을 짜면 나름 적은 모수에 큰 수를 곱하는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해요. 융합 주제는… 바로 생각나는 게 없지만 최대한 작은 연결고리로 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이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루리의 말이 끝나자 선배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교수님께로 향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들 눈으로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교수님의 대답을 보채고 있었다. 막상 제안한 루리도 불안한 마음으로 교수님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교수님은 깍지 낀 손을 풀고 한 손은 의자 팔걸이에 걸치고 반대쪽 손 검지로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모두들 숨 죽이고 교수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났을까, 교수님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나가는 문으로 향하며 이야기했다.
“이번 주까지 팀 짜서 나한테 보고 하도록.”
교수님이 문을 열고 나간 후 문이 철컥 닫혔다. 몇 초의 정적이 여운을 남기고는 다들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의자를 밟고 올라서고 책상에 올라가 드러눕고,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종이들을 공중으로 흩뿌렸다. 과대표 선배는 루리가 기특해 죽겠다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쓰다듬었다. 루리의 머리가 온통 헝클어 질 정도로.
“아름이! 역시 넌 우리 과의 에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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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루리는 한 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과방으로 향했다. ‘Mercy’라고 적힌 검은색 티셔츠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파란 체크무늬 고무줄 치마는 루리의 발걸음에 맞춰 팔랑거렸다. 과방 앞에 다다르자 익숙한 목소리들이 루리의 귓가에 마중 나왔다. 아, 오늘도 프로젝트 모임 하나보다. 루리는 다시 몸을 돌려 1층 로비로 향했다. 공대 건물이 주로 밤에 붐비는 건물이다 보니 오전은 전체적으로 비어있는 건물 같은 느낌이 났다. 아무도 없는 1층 로비 한쪽에 원형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샌드위치를 뜯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샌드위치를 두 입 정도 베어 물었을 때 누군가가 루리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름이!”
고개를 들어보니 과대표 선배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과대표 선배는 모르는 남자 4명과 함께였는데 다 함께 건물을 들어오다가 로비에 있는 루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 무리는 우르르 루리에게로 다가왔다. 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재미있게도 학과장 선배를 제외한 4명의 남자는 머리색이 다들 특이했는데, 노란색, 빨간색, 보라색, 갈색이었다. 한눈에 봐도 저 4명이 팀을 이루고 있고,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에이스 프로젝트에 합류할 밴드겠거니 예상했다. 왜냐하면 갈색 머리를 한 사람이 기타를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대표 선배는 루리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은지 과하게 웃는 얼굴로 루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올라가 있지, 여기서 혼자 뭐해?”
“금방 다시 나가봐야 해요. 음, 반납할 책이 있거든요.”
사실, 반납할 책은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대표 선배의 과한 친절이 불편했고, 알록달록 머리를 한 사람들이 루리를 구경하듯 보고 서 있는 것도 부끄러웠다. 이럴 때 친구 한 명만 있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화학공학과에 같이 입학한 여자 동기 한 명이 있었는데 오리엔테이션 이후 돌연 휴학계를 제출했다. 루리가 1학년의 유일한 홍일점이 된 것이다. 남초 집단에 나름 설레는 기분으로 들어왔지만 꿈꾸는 핑크빛은 온데간데없고 모두 공학에 미친 애들만 모인 것 같았다. 반반한 선배들은 하나같이 여자 친구가 있고, 루리는 학과에서 예쁜 이미지보다는 귀여운 이미지라 다들 동생처럼만 대해줬다. 그냥 조용히 공부에만 집중하겠다 다짐하고 누구보다 학교생활에 열심이었는데 과대표 선배가 이렇게 계속 들이댄다.
“알겠어. 오빠는 먼저 올라갈게.”
과대표 선배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색깔 머리들을 데리고 계단으로 갔다. 기타를 멘 갈색머리가 고개를 돌려 루리를 힐끔 쳐다봤다. 검은색 배경에 하얀색 세로선이 있는 오버핏의 리넨 셔츠는 갈색머리의 하얀 얼굴이 더 돋보이게 해 줬다. 바지는 청반바지를 입었는데 제모를 한 건지 원래 털이 없는 건지 종아리가 깔끔했다. 왁스로 멋을 낸 다른 색깔 머리들과는 달리 단정히 빗은 투블럭이 일자로 내려와 깔끔해 보였다. 쌍꺼풀은 없었지만 눈이 작다는 느낌은 안 들었고, 눈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딱 보면 안다. 쳐다보는 눈과 말하는 눈은 다르다. 루리를 빤히 쳐다보던 갈색머리는 과대표 선배에게 질문했다.
“저분은 누구신데 같이 안 가요?”
“아름이는 1학년이라서 프로젝트 안 해요.”
“아, 이름이 아름인가 보죠?”
“공대 아름이 모르냐? 척하면 척이지.”
“공대 아름이?”
“야, 천재원 너 이름 바꿔라.”
색깔 머리들은 서로 친한지 깔깔대고 웃으며 상대를 놀렸다. 천재원. 저 갈색머리 이름인가 보다. 눈으로 말하는 사람. 루리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나 아름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