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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샘

by 차여름



이곳은 별빛 속삭임 골짜기라 불리는 곳이다. 세상의 번잡함과는 동떨어진, 시간마저 느리게 흐리는 듯한 신비로운 숲. 숲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온몸을 감싸는 싱그러운 공기다. 마치 새벽의 깨끗한 숨결이 피부에 닿는 것처럼 상쾌하고,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햇살은 굵은 나무들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려와, 땅 위에 반짝이는 금빛조각을 수놓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수정처럼 투명한 이슬방울은 무지개 빛깔로 빛나고, 그 아래에는 보드라운 이끼카펫이 깔려있다.


이끼카펫을 뒹굴거리며 책을 읽던 플로라는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한다. 작은 날개로 날아올라 할아버지 탐레인을 찾는다. 나뭇잎 위에서 낮잠 자는 탐레인을 발견하고는 옆자리로 날아가 슬며시 자리 잡는다.

"할아버지~"

탐레인은 가는 귀가 먹었는지 미동이 없다.

플로라는 탐레인이 누워있는 나뭇잎을 세차게 흔든다.

"할! 아! 버! 지!"

손녀의 당찬 목소리에 탐레인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지만 이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플로라를 꼭 안아준다.

"우리 플로라,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 혹시 붉은 샘이 뭔지 알아요?"

"... 그럼 알지.... "

"가 봤어요?"

"그, 그곳은 무서운 곳이야. 가 볼 생각도 하지 말어!"

"무서운 곳이라고요? 제가 읽은 책에서는 '생명의 붉은 샘에는 활력의 정수가 있다'라고 적혀 있던데요? 이걸 마시면 좋은 거 아니에요?"

"네 할미가 바로 그 생명의 붉은 샘에서 죽었단다. 활력의 정수? 생명의 붉은 샘? 그것이 죽음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더냐? 이 할아비에게 붉은 샘은 할미의 무덤 같은 곳이야."

플로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탐레인에게 되물었다.

"붉은 샘은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귀한 자원이고, 이걸 마시면 더 건강하고 튼튼해진다고 하던데요?"

"그건 모두 만들어 낸 이야기란다. 우리 플로라는 똑똑해서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와 실제의 이야기를 구별할 수 있지?"

탐레인은 플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이야기하고는 다시 낮잠을 이어 자기 위해 나뭇잎에 누웠다. 플로라는 탐레인을 뻔히 쳐다보다가 엄마 아일라를 찾아 날아올랐다.


아일라는 흙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 사이에서 '대지의 선물'을 모으고 있었다. 아일라의 빠른 날갯짓은 별빛 속삭임 골짜기에서 최고기 때문에 플로라는 어렵지 않게 아일라를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남들과 다른 움직임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엄마! 엄마!"

"오, 우리 딸 아일라. 뭐 줄까? 대지의 선물? 숲의 이슬?"

"아니~ 배고파서 온 게 아니라, 뭐 물어보려고요!"

"어떤 거?"

"책에서 봤는데, 붉은 샘에 대해서 알아요? 할아버지는 그거 다 가짜라고 하던데?"

아일라는 대지의 선물을 모으던 움직임을 멈추고 플로라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손을 허리춤에 대충 닦고는 나무뿌리를 의자 삼아 걸터앉으며 말했다.

"붉은 샘은 활력의 정수가 흐르는 곳이야. 위험하긴 하지만 아주 귀한 자원이지."

"근데 왜 할아버지는 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해요?"

"음, 할머니가 붉은 샘에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할아버지는 혹시나 플로라 네가 붉은 샘에 갔다가 죽을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거란다. 그렇지만 엄마 생각은 달라. 붉은 샘의 활력의 정수를 먹으면 확실히 특별한 존재가 되거든."

"특별한 존재?"

"그럼. 힘도 강해지고 날갯짓도 빨라져. 엄마 보렴. 이 숲에서 가장 빠르잖아?"

"그럼 엄마도 붉은 샘에 가봤어요?"

"엄마는 붉은 샘에서 활력의 정수를 먹고 돌아왔단다. 우리 플로라가 태어나기 전에!"

"우와! 엄마 대단하다!"

"물론 위험한 곳이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커. 우리 플로라도 언젠가는 그 붉은 샘을 정복해서 더 큰 세상을 만났으면 좋겠어.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누군가는 그 길을 반드시 개척해야 하니까."

플로라는 아일라의 품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아일라는 플로라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이제 돌아가자. 오늘은 숲의 이슬로 식사를 하자구나."



밤의 꽃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피어나고, 나뭇가지 사이로는 반딧불이 별처럼 춤을 추는 깊은 밤, 아일라는 잠든 플로라의 작은 날개를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쉰다. 남편 오베론이 아내의 한숨을 눈치채고는 옆으로 날아와 조심스럽게 자리 잡는다.

"아일라, 무슨 일 있어?"

"숲의 이슬만으로 아이들이 강해질 수 있을까? 플로라의 날개를 봐. 이렇게 작아."

"아직 어리니까 작지.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다 그래."

"이런 날개로 언젠가 찾아올 시련에 어떻게 맞설 수가 있지? 플로라는 똑똑하긴 한데 너무 약해."

"아일라.. 무슨 생각하는지 아..."

"가야겠어. 붉은 샘."

오베론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예전에 아일라가 붉은 샘으로 갔을 때 몇 날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았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숲에선 아내를 붉은 샘으로 내친 파렴치한 남편으로 소문도 났고, 눈만 감으면 악몽을 꾸는 터라 잠도 못 자고 좀비 같은 상태로 버텼던 며칠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다시 생각해 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녀온 곳이잖아. 또다시 목숨을 걸겠다는 거야?"

"그만한 가치가 있잖아. 당신처럼 생각하면 죽는 거야. 내가 왜 죽어? 난 무조건 살아 돌아올 거야."

아일라와 오베론의 언성이 높아지자 둘의 대화를 엿들은 탐레인이 부랴부랴 아들네 부부 곁으로 날아왔다.

"아가! 이게 무슨 말이냐!"

"아버님, 붉은 샘의 효과는 이미 잘 아시잖아요. 당장 저만 봐도 느끼시잖아요."

"그 위험한 곳으로 널 보낼 생각은 없다!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어."

"저는 돌아왔잖아요. 한번 다녀왔으니 더더욱 안전하다고요."

"우리에겐 숲의 이슬로도 충분해! 네가 없는 플로라는 어떡하란 말이냐."

탐레인의 회유에도 아일라는 강경했다. 붉은 샘의 효과를 이미 겪었고, 무사히 살아 돌아왔기에 안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베론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당신이 없으면 아이들은 물론, 나도 살아갈 수 없어. 제발, 가지 마."

아일라는 오베론의 손을 꼭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나무들은 구슬처럼 반짝이는 열매를 매달고, 어떤 나무들은 줄기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다. 잎사귀 끝에 달린 숲의 이슬은 마치 작은 보석 같고, 톡 떨어서 또르르 굴러가 숲을 물들인다.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맑은 멜로디 위로 오베론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린다.

창고에는 아일라가 모아놓은 '대지의 선물'과 '숲의 이슬'이 천장 끝까지 쌓여있다. 아무도 일 하지 않아도 한동안은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양이었다.

탐레인은 한 손으로는 오열하는 오베론의 등을 토닥이며, 한 손으로는 플로라의 작은 날개를 어루만지며 생각한다. 이제 두 사람의 몫까지 잘 키워야겠다고.


"할아버지, 잠이 안 와요."

"플로라. 어서 자야지. 내일 아침, 너의 작은 날개가 더 튼튼해지면, 우리 함께 숲의 이슬을 찾아 떠나자꾸나."

탐레인은 환한 달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린다.

"밤은 길고, 붉은 샘은........ 너무나 위험하구나."









"오빠! 나 어제 모기 물렸어!"

"어쩐지. 내가 새벽에 모기 한 마리 잡았는데 피를 엄청 빨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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