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만족과 브랜드의 해결책 사이
우리 브랜드와 패키지를 위한 전략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나면, 드디어 디자이너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온다. 브랜드가 입을 옷을 만들어주는 아트웍 단계다. 고객 경험의 상당한 비중이 온라인으로 전환된 지금, 손에 잡히는 제작물과 패키지를 만드는 이 단계가 BX디자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세워놓은 디자인 전략이 무색할만큼, 이렇게 미적인 감각과 욕심이 앞서 나가는 단계도 없다. 모니터 위에서 나는 자유롭고, 내가 고른 컬러와 서체로 화면이 채워질 때의 희열은 짜릿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 순간이 실무에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때였다.
"이게 더 예쁜데 왜 안 된다고 하지?" 클라이언트나 마케터와 부딪힐 때마다 속으로 삼켰던 불만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브랜드를 위한 제품'이 아니라 '나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오늘은 내가 디자인을 하며 겪었던 그 미묘한 차이, 나의 만족과 브랜드의 해결책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배웠던 것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디자인을 막 시작했을 때는 '여백'이 두려웠다. 빈 공간이 보이면 성의 없어 보일까 봐, 혹은 내 실력이 부족해 보일까 봐 무엇이라도 채워 넣어야 마음이 놓였다. 가장 흔하게 부렸던 고집은 '영문 로고'에 대한 집착이었다. 한글보다는 영문이 조형적으로 해석된다는 이유로, 브랜드 이름도 슬로건도 영문으로 크게 배치하곤 했다. 그래야 소위 '있어 보이는' 디자인이 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깨달은 건 정반대였다. 소비자는 내 디자인을 감상하러 온 관람객이 아니다. 그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이게 무슨 제품이지?"를 파악하고 구매를 결정한다. 멋 부린 영문 때문에 제품명을 읽지 못한다면, 소비자에 기억에 남기 어렵고 당연히 구매로도 이어지지 못한다. 그건 '불필요한 디자인'일 뿐이다.
오히려 과감하게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메인으로 내세워 직관성을 높이거나, 의미 없는 장식 요소를 싹 걷어냈을 때 브랜드의 메시지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는 것.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훨씬 어렵고 효과적인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패키지에 활용하는 방식은 식품 패키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식품패키지 표기 기준에 따르면 제품명은 주표시면(전면부)에 22포인트 이상, 한글로 표시하는 게 원칙이다. 영어와 병기할 경우 영어는 한글과 크기가 같거나 한글보다 작게 표시해야 한다. 영어로 제품명을 크게 쓰고 싶다면 똑같은 크기의 한글로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국내 식품 패키지는 한글 로고타입을 선호해왔다. 오리온의 스테디셀러 제품들을 보면 원래는 각자 개성을 가진 로고타입으로, 제품마다 디자인이 독립적이었다. 최근에는 '오리온 초코파이', '오리온 카스타드', '오리온 후레쉬베리' 세 제품의 로고타입 시스템을 통합해 하나의 브랜드로 느껴진다. 브랜드보다 각각의 제품을 강조했던 이전과는 달리 제품 라인업이 브랜드를 중심으로 정립되고 있다.
우리는 신생 브랜드라서 오리온처럼 인지도가 높지 않다면? 작은 브랜드일수록 잠재적 소비자가 우리 브랜드를 기억할 수 있는 잔상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시장을 개척하는 후발주자는 제품보다 브랜드 중심으로 소구한다. 우선 브랜드를 알리는 게 중요하니 이때는 제품명마다 로고타입을 만들 필요가 없다. 식품패키지 표시 기준을 다시 살펴보고, 브랜드명과 제품명이 다를 경우 브랜드명의 크기 규정은 없다는 점을 활용해보자. 룩트와 오넛티처럼 제품명은 규정된 최소 크기로 표기하되, 브랜드 로고타입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구성하는 것이다. 제품군이 달라져도 하나의 브랜드로 그려지는 공통의 상을 만든다.
참고로 수입 식품 마켓에 가면 패키지가 왠지 다 예뻐 보이고 힙해 보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건 해외 디자인이 무조건 우월해서가 아니라, 좀 더 느슨한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미 제작된 패키지에 수입 스티커만 부착하면 되기에, 한글 표기 규정이라는 디자인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덕분이다.
가끔 취업 준비생 시절이나 개인 작업으로 만들었던 포트폴리오를 다시 열어본다. 지금 봐도 참 화려하고 자유롭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엔 제약이 없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예산을 쓰고, 인쇄 감리는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바코드 위치나 법적 표기 사항 때문에 레이아웃이 망가질 걱정도 없었다. 내가 곧 클라이언트였으니 모든 것이 내 뜻대로였다. 하지만 실무는 온통 "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다.
"예산 때문에 2도 인쇄만 가능합니다."
"바코드 위치는 기계 인식 때문에 절대 변경 불가입니다."
"종이 재질은 단가 문제로 가장 저렴한 걸 써야 해요."
처음엔 이 수많은 제약들이 내 창의성을 갉아먹는 족쇄처럼 느껴져 답답했다. 디자인 예쁘게 다 해놨는데 뜬금없이 들어가는 바코드 박스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되었다.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멋진 그림을 그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진짜 실력은 한정된 예산과 까다로운 규격,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 안에서도 브랜드의 색깔을 잃지 않고 최선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이다. 제작 예산이 없다면 지기구조로 구성품의 종류를 줄이거나, 유통 과정에서 손상이 우려된다면 그에 맞는 용지와 코팅을 고른다. 인쇄 도수에 제한이 있다면 한정된 색의 조합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것. 그 '해결 능력'은 오직 제약 속에서만 길러지는 근육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제약들을 게임의 규칙처럼 받아들인다. "이 까다로운 조건 안에서 어떻게 풀어내야 가장 효과적일까?" 이 질문이 나를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들고, 그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은 단순한 '작품'을 넘어 시장에서 살아남는 단단한 '제품'이 되어주었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내 포트폴리오에 남을 '인생작'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브랜드가 처한 상황이나 제품의 본질보다, 내 그래픽 스타일이나 요즘 유행하는 기법을 앞세우기도 한다. "이게 요즘 힙한 스타일이거든요", "제가 이런 느낌을 잘 내거든요"라며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려 했던 순간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돈으로 개인 작업을 하려는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상업 디자인의 본질은 '철저한 타자성'에 있다. 디자이너의 자아가 너무 커지면 정작 주인공인 브랜드는 가려지기 마련이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여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만, 디자이너는 브랜드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여 세상에 답을 내놓는 사람이다.
우리는 브랜드가 하고 싶은 추상적인 말(정서적/기능적 가치)을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시각 언어로 통역하는 번역가이자, 복잡한 시장 상황 속에서 최적의 길을 찾아주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실무에서의 모든 디자인 결정에는 "그냥 예뻐서요"가 아닌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다.
나만의 탄탄한 기획이 담긴 BX/패키지 프로젝트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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