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성을 다루는 디자이너의 능력
패키지디자이너도 요즘은 디자인 작업의 많은 단계를 컴퓨터 화면 앞에서 진행한다. 특히 AI 활용으로 더 빨리, 효율적으로 바뀐 부분이 많다. 하지만 디자인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한 마음이자 내 커리어의 방향성이 있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결과물,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경험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패키지디자이너가 다루는 결과물은 모니터 속의 빛나는 픽셀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고 뜯겨지는 실물이다. 아무리 화면 속에서 기가 막힌 컬러를 잡았어도 인쇄기가 그것을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면 실패작이고, 그래픽이 인쇄되는 용지의 질감이 브랜드와 어울리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디자이너의 몸은 책상에 있을지라도 영혼은 잉크 냄새와 기계 소음이 가득한 물성의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클라이언트와 브랜드/패키지에 필요한 디자인 개발을 논의하는 초기 단계부터 이를 염두에 둘수록 좋다. 인쇄와 후가공은 평면의 화면에서 납작한 종이로, 브랜드를 보여주는 입체의 물성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이다. 오늘은 클라이언트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을 토대로 인쇄와 후가공 이야기를 해본다.
용지의 백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색을 꽉 채워 사용하거나, 색의 가짓수를 많이 사용한 디자인일 경우 클라이언트는 불안해진다. 특히 별색을 지정해 조그마한 팬톤칩을 들이밀며 '실제로는 이 컬러로 나올 거예요.'라고 하는 순간, 클라이언트는 당황한다. 디자이너는 화면 속의 디자인을 인쇄물로 제작해본 경험이 많지만, 클라이언트는 화면에서 인쇄물을 상상해보는 과정이 낯설다.
그래서 이 질문은 꽤나 자주 듣게 되는데, 인쇄와 출력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을 때 생기는 궁금증이다. 이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바로 '판(Plate)'의 유무다. 이럴 때 붕어빵을 예로 들어 설명하곤 한다.
인쇄 (Offset)
붕어빵을 대량으로 찍어내려면 무쇠로 된 '틀(판)'이 필요하다. 옵셋 인쇄도 마찬가지다. CTP라는 전용 판을 만들어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방식이다. 판을 만드는 초기 비용과 시간은 들지만, 한 번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1,000장이든 10,000장이든 균일하고 선명한 퀄리티로, 아주 빠르게 찍어낸다. 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대부분의 매끈한 상자들이 이 방식이다. 대량 생산에 적합하며, 수량이 많아질수록 개당 단가는 급격히 떨어진다.
출력 (Digital/Indigo)
반면 출력은 우리 집 프린터기처럼 데이터에서 바로 종이로 잉크를 쏘는 방식이다. 판을 만들 필요가 없으니 1장도 뽑을 수 있고 수정도 자유롭다. 최근 많이 쓰는 '인디고(Indigo) 출력'은 인쇄에 버금가는 퀄리티를 내지만, 대량으로 갈수록 잉크값이 비싸 단가 효율이 떨어진다.
물론 샘플용으로 1장만 (옵셋)인쇄할 수 있다. 하지만 인쇄판을 만들고, 우리가 쓸 용지를 (소량이라도)발주하고, 거대한 옵셋인쇄기가 돌아가는 기본 비용이 10만원대로 높다. 제작하는 패키지/인쇄물의 수량이 몇 만부 수준이라서 샘플 비용이 확보되거나, 색감의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싶은 프로젝트에는 추천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부담스럽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예산과 발주 상황에 맞춘 샘플 확인법을 제안한다.(이건 추후 예정된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인쇄물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는 수량, 용지, 인쇄, 후가공, 포장과 배송까지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 이 모든 변수를 모두 정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인쇄소에 따로 문의를 해야 정확한 견적 산출이 가능하다. 요즘은 기본적인 용지와 규격, 인쇄 방식을 시스템화해서 자동 견적과 주문까지 한 번에 확인 가능한 업체가 많아졌다. 그래서 이런 업체에서 자동 견적을 확인해본 클라이언트는 가장 저렴한 업체에서 하면 되지 않냐는 질문을 한다.
그런데 저렴하게 책정된 제작비로 우리 디자인이 원한대로 나올 수 있을지, 시스템화된 업체의 조건에 맞추다보면 이게 정말 저렴한건지는 따져봐야 한다. 이때는 클라이언트에게 합판과 독판의 개념을 함께 설명한다.
합판 인쇄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디자인 데이터를 하나의 커다란 판에 모아서(합쳐서) 인쇄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대중교통인데, 버스에 여러 승객이 함께 타듯이, 내 디자인 옆에 다른 회사의 전단지, 명함, 스티커가 함께 앉혀진다. 장점은 명확하다. 제작비(판값과 종이값)를 1/N로 나누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저렴하다. 온라인 자동 견적 사이트들이 저렴한 이유가 바로 이 합판 방식을 시스템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버스 기사님이 승객 한 명 한 명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듯이, 인쇄 기장님은 판 전체의 '평균적인 색감'을 기준으로 기계를 돌린다. 만약 내 디자인 옆에 유독 붉은색이 많이 들어간 디자인이 배치된다면? 내 디자인도 덩달아 붉게 나올 확률이 높다. 내가 원하는 정확한 색감을 구현하기 어렵고, 용지 선택의 폭도 업체가 정해둔 기본지 몇 가지로 제한된다.
독판 인쇄
반면 독판은 오직 우리 브랜드의 디자인만을 위해 판을 새로 짜는 방식이다. 택시를 탄 것처럼 내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내가 원하는 속도로 갈 수 있다. 인쇄 감리를 나가서 기장님께 "컬러가 너무 탁하니 옐로우를 3%만 빼주세요"라고 디테일하게 요청할 수 있고, 브랜드의 결에 맞는 특수지나 수입지를 자유롭게 골라 쓸 수도 있다. 물론 그 비용은 온전히 우리 브랜드가 부담해야 하기에 합판보다 훨씬 비싸다.
결론: 싸고 좋은 건 없다, 목적에 맞는 것이 있을 뿐
한 번 쓰고 버려질 홍보용 전단지나 내부 스티커라면 합판(저렴한 업체)이 효율적이다. 하지만 브랜드의 얼굴이 되는 메인 패키지나, 브랜드 고유의 컬러가 중요한 작업물이라면 비용이 들더라도 독판으로 진행한다. 처음에는 저렴한 업체에서 하고 싶다고 했던 클라이언트도 우리 브랜드에서 사용하고 싶은 용지, 별색, 후가공에 제한이 생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판으로 진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저렴한 견적서에 혹해 브랜드의 퀄리티를 타협하는 순간, 그동안 모니터 앞에서 쏟았던 디자이너의 시간은 물거품이 된다. 결국 인쇄소를 결정하는 기준은 가격이 아니라, 이 디자인이 세상에 나와서 해야 할 역할이어야 한다. 물론 나는 브랜드를 책임지는 디자인 전문가로서, 클라이언트의 질문 공세에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적은 비용의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을 제안하려 노력한다. 그것이 물성의 세계를 다루는 디자이너의 진짜 능력이니까.
나만의 탄탄한 기획이 담긴 BX/패키지 프로젝트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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