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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경아 Jun 18. 2021

개인 작업으로 활자체를 만들어요?

한글 활자체 제작기 1편

2018년 여름부터 디스플레이 활자체 <길상>을 그리고 있다. 작업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면서 활자체를 보고 다루는 시각이 처음과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작업의 후반부인만큼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하고 넘어갈 시점에 온 것을 느꼈다. 비록 본업이 아닌 개인 작업으로 활자를 다루고 있는 사람의 글이지만 활자디자인을 시작하려고 하거나 작업자의 소회가 궁금한 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길상>은 한글타이포그래피학교의 활자디자인 수업에서 기획한 활자체다. 이어지는 두 번의 수업이 끝난 후 2019년 5월에 열린 전시 히읗 7회 <글-하다>에 참여했고 2020년 7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tumblbug)을 통해 후원금을 모았다. 지금은 2021년에 최종 버전을 완성하기 위해 틈틈이 작업하고 있다.




[길상체 작업 타임라인] 연도별 작업 현황과 진도율. 진도율은 폰트가 되기 위해 갖춰야하는 글리프 작업 진도를 나타냄.





활자 작업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한 시점을 꼽아서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활자디자인은 태어나서 자라고 디자인을 배우는 동안 연쇄적으로 일어난 일들의 결과에 가깝다. 나는 그림만큼 손글씨를 굉장히 좋아했고 곧잘 쓴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자랐다. 컴퓨터를 익히고 나서부터는 모니터 속의 글자, 폰트에 관심이 많았고 숙제를 할 때 오타는 보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폰트를 찾아 이것저것 눌러보는 데에는 시간을 할애했다. 또 글자 자체를 좋아하는 것만큼 지면에서 글의 정렬을 바꾸고, 사진을 넣고, 표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한글 프로그램으로 동아리 소식지를 만들었는데, 화면 속에서 글과 사진을 이리저리 배치하며 정말 재밌어했던 기억이 있다. 한글의 조형과, 지면을 구성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매력을 일찍이 알아챈 것이다. 이런 내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인쇄물을 만드는 그래픽디자이너가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한컴오피스 프로그램에서 폰트 설정 기능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픽디자인 일을 하면서도 활자디자인은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작업물에 활자체를 사용할 때마다 질 좋은 한글 폰트가 많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법률상 표기 의무가 없다면 선택지가 많은 라틴 활자체를 디자인 전면에 사용하고 한글은 보조 수단으로 활용했다. 한글 폰트에 갈증을 느낄 때마다 라틴과 어울리도록 몇 글자라도 직접 디자인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활자를 가지고 디자인 작업물을 만드는 것과 활자 자체를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의 일이고, 한글 폰트 하나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글자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디자인에 대한 확신은 작업을 먼저 시작한 선배 디자이너들에게 받았다. 2017년에 열린 전시 히읗 5회 전시장을 방문해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전시장에서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사용자 입장에서 한글 폰트 시장에 바랐던 ‘품질과 개성’을 충족한 글자들로 채워진 공간이었다. 역사 속의 글자를 복원하는 동시에 디자이너 개인의 해석을 더해 태어난 글자들은 각자의 매력으로 빛이 났다.





국내 디자인 업계는 활자체 작업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제대로 보상받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활자디자인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디자이너들이 존경스러웠다. 끝없이 고민하고 수정을 거듭했을 시간이 담긴 작업물을 보니 디자이너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들을 응원하는 동시에 나도 용기를 얻었다. 이들만큼 새롭고 유용한 활자체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도전해보기로 했다. 디자이너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글 활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글 폰트 시장이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먼저 도전한 디자이너들을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는 나를 통해 또 다른 확신을 얻어가지 않을까?



2018년 8월,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진행하는 활자 기획 수업의 문을 두드렸다. 기획 수업에서는 1970년대 이전의 옛활자를 공부하는 동시에 당시의 국내 폰트 시장을 파악했다. 기획을 시작한 2018년을 기준으로, 국내 폰트 시장에서 독립 디자이너가 만든 활자체는 본문용 민부리 계열이 많았고 부리 계열은 1세대 글꼴디자이너 최정호의 원도에서 영향을 받아 대부분 비슷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글자의 개성과 활용도 사이에서 내가 그릴 글자는 어느 지점에서 시작할지 고민했고 뼈대가 되는 옛활자를 조사하면서 조금씩 글자의 인상을 구체화했다.



당시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에 푹 빠져 있었고 이 책으로 인해 받은 좋은 영향이 창작의 소재가 되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인 ‘길상’을 모티브로 활자체를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길상은 단호하고 투박하게 표현하지만, 진중하고 다정한 면모가 있으며 누구보다 강인하다. 이를 활자의 구조와 획, 윤곽과 글줄흐름 등의 특징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길상의 말투, 성격과 삶의 태도가 ‘인상’이라는 맥락을 공유하며 활자체에서 은유적으로 드러나길 바랐다. 인물 ‘길상’의 ‘단단하고 진중한’ 인상을 의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힘있는 목소리의 디스플레이 활자체를 그리게 되었다. 큰 크기로 사용하는 디스플레이 활자체는 유려하고 섬세하며 정교하게 디자인한다. 그리고 시각적 힘이 강해야 한다.** 나는 길상을 그리면서 단단하고 묵직한 글자의 구조와 획 표현을 통해 활자체 <길상>의 투박하지만 강인한 힘을 담으려고 했다.


* 소설 <토지>로부터 받은 영향은 브런치 글 [20권의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편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 유지원, “텍스트 활자체 Vs. 디스플레이 활자체”, FONT CLUB, 2012. 8. 17





작업하면서 스스로 세운 목표는 ‘개성 있고 쓰임새가 좋은 글자를 만드는 것’이다. 개성을 담기 위해 글자 공간의 분배와 무게, 획의 형태와 강약 표현을 고민하며 형태를 정했다. 다른 활자체를 기반으로 보완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길상만의 고유한 인상이 느껴지길 바랐다. 글자의 개성이 디자이너 개인의 취향과 역량의 문제라면 쓰임새는 글자가 활자체(폰트)가 되었을 때 사용자와 관계를 맺는다. 디자인을 하면서 개성 있는 활자체를 작업에 사용하고 싶어 매번 시도하지만 어려움이 많다. 매체 환경의 물리적인 조건에 맞지 않는다거나, 형태적 개성이 강한 나머지 섞어짜기에 부적절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폰트의 상업적인 활용도가 무척 중요하다고 느낀다. 폰트는 사용자가 적재적소에 사용했을 때 진가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길상>의 뼈대는 세로쓰기 환경에서 사용된 매일신보 활자체지만 이를 현대의 매체 환경에 맞춰 가로쓰기에 어울리는 구조로 바꾼 이유다.







활자디자인 세계를 기웃거리며 엿보던 내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의 수업을 수강하면서 약 100자를 만들었다. 이때의 글자들은 앞으로 폰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새싹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낯선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는 꼭 순진한 얼굴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던데, 활자디자인을 막 시작한 나도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금방 그만둘 일을 시작하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마음은 얼마나 들떠있었는지 모른다. 거의 매일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작업 과정을 올렸으니 말이다.







글자와 이미지의 조합을 좋아했던 나는 그래픽디자이너가 되어 개인작업으로 활자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동안 키워온 나의 취향과 감각은 10대와 20대를 잇고, 일과 개인작업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도 벌리기도 하면서 활자디자인으로 가지를 뻗었다. 이제는 인격체로 느껴지는 활자체 <길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둘다 계속 변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길상>의 제작 과정에 대해 연도별로 써볼 생각이다.




교정 및 교열: 김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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