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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경아 Jun 01. 2021

20권의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소설 <토지>가 내게 준 것

영향력이란 무엇일까? 사람으로부터 발휘되는 힘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아직 20대를 지나가는 중이지만 나의 20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존재는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라고 할 수 있다. 1년간의 독서 후 2년이 흘렀고 나는 올해 두 번째로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지난 4년을 돌아보자면 <토지>가 원동력이 되어 알게 되고 행동한 것들이 있다. 그 변화는 내 안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준 것이라기보다는 생각과 마음의 영역에 큰 깃발을 꽂으며, 여기가 나의 중심이라고 알려주는 방식으로 찾아왔다. 20권의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변화의 씨앗이 되는 영감과 통찰력은 얻을 수 있다.



<토지>는 박경리 작가가 1969년도에 연재를 시작해 완결까지 집필에만 25년이 걸린 약 400쪽짜리 20권 분량(개정판 기준)의 대하소설이다. 책 자체도 유명하지만 1987년, 2004년에 TV드라마로 제작되어 이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고등학생일 때 12권의 청소년판으로 편집된 버전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혹시 수능에 나올까봐 의무감에 봤을 뿐이었다. 그때는 이 책이 나의 20대에 이렇게 영향을 끼칠 줄 몰랐다.



제대로 읽게 된 계기는 2017년에 방영한 tvN 예능 <알쓸신잡> 1화에서 통영에 방문한 출연자들이 <토지> 이야기를 꺼낸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니까 친하지 않았지만 한 번쯤 다시 보고픈 친구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검색해보니 긴 분량 때문에 읽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내가 한 번 완독해볼까? 단순한 마음에서 시작한 독서였다.


<토지> 20권을 다 읽는 데에는 딱 1년이 걸렸다. 시작했으니 끝내보자는 마음으로 읽었던 건데 점점 이야기에 몰입했다. 1년 내내 하루의 일정 시간은 <토지>를 읽으며 보냈고 어딜 가도 챙겨 다녔다. 책 속 시대와 인물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그들과 함께 많이 울고 웃었고 20권을 완독한 후에는 사람들과 갑자기 헤어진 느낌이 들어 한동안 후유증을 앓았을 정도다. 처음부터 이 책에 애정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읽어도 줄지 않는 것처럼 분량이 길었고 약 600명의 등장인물이 이렇다 할 소개 없이 등장해서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힘들어하는 바로 이 지점이다. 반세기 역사를 ‘토지’라는 맥락으로 담아낸 긴 이야기와 삶의 단면을 낱낱이 보여주는 수많은 인물들은 잠깐 읽어서는 헤아릴 수 없고 끝까지 읽어야 알 수 있다. 2시간짜리 영화도 10분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시대에 400쪽짜리 20권 분량의 활자를 직접 눈으로 읽는 의미는 남다르다. 이야기의 흩어진 퍼즐이 온전히 맞춰져서 여백 없이 딱 들어맞는 느낌, 이때의 뿌듯하고 애틋한 마음은 완주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보상과도 같다.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집중하려면 예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산만한 성격이고, 선택의 순간에 난관이 예상되면 지레 겁을 먹고 다른 곳을 찾아 방향을 틀어버리곤 했다. 10대 때 배운 피아노, 단소, 플루트를 오래 지속하지 못했고 20대 초반에는 그림이라는 꿈과 학교 생활을 접어버리기도 했다.


모든 일에 잠깐 숨을 참으며 버티다가 짧게 몰아 쉬는 호흡으로 살았던 내가 정독을 시작하며 느꼈다. 단숨에 읽고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니구나. 조바심 내지 않고 지속하는 것에 초점을 두면서 천천히 읽었다. 힘주지 않고, 단숨에 끝내려 하지 않고, 매일 넘치지 않을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 토지를 읽다 보니 어느새 완독의 순간이 왔다. 나는 그때 비로소 깊게 들이쉬고 길게 내어쉬는 일정한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집필에만 25년이 걸렸다는 박경리 작가를 떠올리면 생애를 바친 창작의 의지와 인고의 시간에 경외감이 든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내가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우선 깊게 숨을 들이쉬어본다.




<토지>를 읽는 동안 내 안에서 선명해진 것도 있다. 이전의 나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늘 길을 잃었다. 세련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보면 그 모습이 멋지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의 취향에도 부합하는지 생각해보면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해졌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멋지고 세련되었다고 말하는 모습이 대부분 서양인들이 키워온 생활 감각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취향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습득한 문화적인 배경을 근간으로 하고, 우리는 그 취향에 따라 의식주를 선택하고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익숙하다못해 자연스럽게 나를 이끄는 것이 바로 취향인 것이다.




나는 <토지>를 읽으면서 나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문화적 감수성이 철저하게 한국적이라고 느꼈다(여기서 ‘한국적’이란 ‘전통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게, <토지>의 시대적 배경인 개화기 이후 형성한 문화를 말한다). 책을 읽으며 만난 한국적인 요소들이 고향에 온 듯 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사계절을 가진 자연 풍경과 생활이 드러나는 묘사를 읽으면 그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고, 인물들이 구사하는 전국 각지의 사투리는 언제 들어도 매력이 넘쳤다. 유대의 감정을 주고받는 농민들의 생활과 소박하지만 둘러 앉아 먹는 식사 장면들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소환했다.


나는 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디지털 세대지만 어린시절 의식주는 한국적인 테두리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공유하는 한국인의 정서와 감각을 가지고 있다.’내 취향은 멋지거나 특별하지 않은걸?’ 지금까지는 평범해서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은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외면했던 것 같다. 어쩌면 문화에도 우위가 있고 이에 따라 문화의 세련됨이 뒤따른다는 편협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아침식사로 시리얼 대신 누룽지를 말아먹고 2000년대의 절절한 한국 발라드를 들으며 출근하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 나다운 내 모습을 존중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토지> 통해 지속하는 삶의 호흡에 대해 배우고, 나의 문화적 감수성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창작의 연결고리가 형성됐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드는 디자이너라서 좋은 것을 보면 디자인 작업과 연결지어 생각해본다. 좋은 창작물의 곁에서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갈 나의 새싹을 키우는 셈이다. 돋아난 싹은 2018년부터 3년째 작업하고 있는 디스플레이용 활자체 <길상>이다. 미술과 디자인이라는  맥락 안에서 움직이며 진로를 정했지만 <토지> 통해 배운  호흡으로 일을 지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픽디자이너 2년차일  오랫동안 망설인 한글 폰트 제작을 개인 작업으로 시작했다. 디자이너의 직무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나의 한국적인 감수성을 드러낼  있는 작업이다.


활자체의 이름인 <길상>은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박경리 작가는 토지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으며,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성찰한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넘어지는 인물은 ‘길상’이다. 길상은 읽는 내내 가장 마음이 많이 쓰인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문화적 감수성과 취향을 담아, <토지>라는 작품에 헌정하는 의미를 담아 소설 속 길상을 모티브로 활자체를 디자인하고 있다. 3년째 진행하는 이 작업이 마무리되면 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지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20권의 책은 내게 변화의 씨앗을 주었고 나는 비와 바람을 맞기도 하면서 다른 변화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지를 열심히 키우고 있다. <토지>와의 인연은 시작부터 창작의 연결고리까지 온전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받은 긍정적인 영향력은 글 한 편으로 표현하기 부족하지만 그동안의 생각과 변화를 한 번 되짚어본다는 의미로 정리했다. <토지>와 같이 내 마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거나 갖고 있는 마음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어떤 만남을 기대해 본다.





교정 및 교열: 김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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