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영감 수집법
디자이너도 사람이라서 계속해서 일정한 수준의 결과물을 내기란 쉽지 않다. 아웃풋(Output)이 나오려면 인풋(Input)이 필요한 법이다. 신입일 때 나의 샘솟는 아이디어는 절대 마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말라갔다. 나는 이제 위기를 느낄 때마다 곳간에 비상식량을 비축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콘텐츠를 체험하고 수집해서 나의 디자인에 활용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나름대로 대처 방법을 찾은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 이후 내가 접하는 콘텐츠도 온라인 중심으로 변했다. 온라인의 장점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겪어보니 의외의 단점도 있다. 가장 큰 단점은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이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되어 있고, 접촉과 입력이 빠른만큼 휘발성이 강한 것이다. 하루 동안 꽤 많은 콘텐츠를 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인사이트(Insight)는 손에 꼽았다. 그야말로 순간의 ‘자극’이 되었지 ‘영감’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원한다고 해서 다시 오프라인 중심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콘텐츠 없는 메마른 일상을 살거나, 온라인 매체 중심인 현재에 적응하거나. 결국 나는 지금 상황에 적응하고,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는 콘텐츠를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직접 해보니 효과가 좋았던 경험을 토대로 ‘자극을 영감으로 만드는’ 나의 방법을 적어본다.
습관처럼, 온라인 콘텐츠 수집
새로 시작한 디자인이 전에 해보지 않은 영역의 것이라면 꼼꼼한 조사와 함께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레퍼런스는 디자인의 방향성을 설정할 때 유용하고, 협업자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수월하게 해 준다. 레퍼런스가 되는 콘텐츠의 양과 질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날을 잡지 않고 ‘평소에 틈틈이’ 하고 있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는 레퍼런스 수집에 시간을 분배하기 어려울 때가 있고, 작업 직전에 본 콘텐츠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을 위험이 있다(경력이 길지 않은 내가 특히 유의하는 지점이다).
수집에는 주로 ‘핀터레스트(Pinterest)’와 ‘비핸스(Behance)’를 이용하는데, 하고 있는 작업과 상관이 없더라도 눈길이 가는 대로 분류해서 모은다. 핀터레스트는 비슷한 분위기의 이미지를 빠르고 많이 찾는 데에 탁월하다.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 나의 작업에 참고할 지점이 보일 때마다 적합한 주제의 보드를 만들어서 핀(Pin)한다.
이때 수집하는 콘텐츠는 꼭 디자인 결과물이 아닐 수도 있다. 가령 포스터 작업의 콘텐츠를 모아두는 보드에는 완성된 포스터뿐만 아니라 포스터에 적용할 수 있는 소재와 부착 방식, 재단 방식 등을 함께 수집한다. 포스터처럼 큰 판형에 사용하면 좋을 것 같은 폰트와 컬러 조합도 포함한다. 이렇게 축적한 자료는 포스터라는 주제로 엮인 일종의 ‘영감 사전’이 된다. 나는 이렇게 주제별, 프로젝트별로 보드를 나눠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본다.
비핸스는 하나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자세히 살펴보고 구조를 파악하기에 좋다. 시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디자인은 주로 ‘결과물’의 형태인 경우가 많은데, 비핸스와 같은 포트폴리오 사이트에는 디자이너가 공유한 ‘고민과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비핸스에서는 디자이너들이 계정을 만들어 각자의 작업을 게시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한 프로젝트의 경우 협업자를 추가할 수 있다. 이 기능을 활용해 한 디자이너의 개인 작업과 협업 작업을 함께 찾아보면 흥미롭다. 협업 프로젝트에서 특정 디자이너의 개성이 돋보이거나 협업 디자이너들의 시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요즘은 '인스타그램(Instagram)'에서 접할 수 있는 콘텐츠도 상당하다. 나는 대부분 디자인, 패션(회사 업무) 관련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은 콘텐츠 창작자가 직접 자신의 계정에 업로드하기 때문에 계정별로 피드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디자인 콘텐츠는 이미 핀터레스트와 비핸스로도 충분해서 요즘에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많이 본다(이 이야기는 세 번째 이야기에서 자세히 언급하겠다).
보관과 숙성이 중요한 오프라인 속 콘텐츠
회사를 떠날 수 없을 때 영감을 찾아 돌아다니며 온라인 콘텐츠를 수집하고 있지만,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오프라인에서도 틈틈이 콘텐츠 수집을 하고 있다. 목적이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라면 대개 방문자들의 손에 쥐어주는 홍보물이 있다. 영화관과 전시회에 비치된 인쇄물부터 음식점에서 받는 명함과 카페에서 찍어주는 도장 쿠폰까지, 형태와 종류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그래서 좋은 자극을 주는 오프라인 공간에 방문하면 작은 인쇄물일지라도 꼭 챙겨 온다. 그리고 연도별로 마련한 보관함에 넣는다. 콘텐츠 수집이 또 다른 일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연도를 나누는 것 이외의 분류 작업은 하지 않는다. 보관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숙성’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영감을 주는 인쇄물을 주기적으로 꺼내서 펼쳐두고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인쇄물 디자이너에게는 손으로 잡고 펼치고 다시 접어보면서 배우는 몸의 감각이 필요하다. 인쇄물의 크기와 용지에 대해 ‘만져보면 알아채는’ 선임 디자이너와 인쇄소 사장님을 보고 경외했다. 손끝에서 배어 나오는 그들의 감각을 배우고 싶어서 끊임없이 익숙하고 낯설기도 한 물성의 감각을 직접 경험해보려고 노력한다.
다소 귀찮고 번거로운 이 일에 들어간 내 힘의 총량은 몇 년치를 합쳐도 크지 않다. 하지만 잘 보관하고 숙성된 연도별 인쇄물 보관함이 주는 든든한 마음과 배움은 어떤 수치로 측정할 수 없다. 컴퓨터 화면 속에서 디자인을 바로 완성하는 것과 실물의 물성을 느껴본 후에 진행하는 것은 디자인 과정과 결과에 큰 차이를 낳는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내가 제작하는 작업물이 최종적으로 소비자들과 만나는 공간에 미리 가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인쇄물 자체만 보면 괜찮아 보여도 특정 환경(조명, 시야, 습기 등)과 만났을 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연차와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 내가 그렇지 못하다면 직접 공간에 가서 느낀 감각을 충분히 활용하고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자극은 영감으로 소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 번째 이야기는 동시대 창작자들에게 보고 배운 점을 위주로 작성해본다. 콘텐츠 수집을 통해 나만의 영감 보관함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코로나19 확산 이전의 일이었다면 지금 소개하는 내용은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더 중요하다고 느낀 방법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접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빠르게 다량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지만 내가 콘텐츠를 흡수하고 파생하는 생각의 밀도는 현저히 낮아졌다. 그래서 콘텐츠의 자극을 내 안에서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내가 쓰는 단어와 문장으로 다시 한번 기록하려고 한다. 온/오프라인 콘텐츠 수집이 영감의 1차적인 아카이브 역할을 했다면, 언어적-시각적인 가공을 거쳐 2차적인 아카이브를 만들 필요가 있다.
나의 언어로 ‘기록해서 소화시키는 일’에는 다양한 방법과 요령이 있다. 요즘은 주제별로 계정을 분리해 SNS 채널을 관리하거나 노션(Notion)과 같은 온라인 워크스페이스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온라인에서는 계정으로 통하는 가상의 자아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와 주제에 따라 플랫폼 하나도 똑 부러지게 활용하는 고수들을 보며 배운다.
필요한 콘텐츠를 수집하고 나의 언어로 기록해서 인사이트를 발굴하고 공유하면,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과 연결시켜주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하는 온라인 세계는 어느덧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콘텐츠 생성의 장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채널의 영향력이 커지고 매체의 역할까지 겸하게 된 지금은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매체이자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다.
최근 들어 풍성해진 뉴스레터 서비스가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이제 주어진 콘텐츠를 수집-재생산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며 공유-소통하고 있다. 매체와 플랫폼의 힘에 기대지 않고 자생력을 키워가는 사람들을 주관적인 의미의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부르고 싶다. 변화의 흐름에 늘 한 발 늦게 합류하는 내가 요즘 주목하는 지점이다. 이제는 인터넷이 있으므로 누구나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콘텐츠의 자극 속에서 자신만의 시선과 기준으로 정보를 모으고 소화해서 다시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졌다. 외부의 자극을 소화해 자신의 영감으로 만드는 일 말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중략)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 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 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 을유문화사(2020.
흡수한 온/오프라인 콘텐츠를 그래픽 디자이너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재생산하는 것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앞선 두 가지 방법-콘텐츠의 수집과 보관, 활용-에서는 이제야 조금 능숙해졌다고 느꼈는데, 넘어야 할 다음 스테이지를 만난 기분이다. 하지만 부담이나 중압감을 먼저 느끼기보다는 내게 올 변화에 궁금증과 기대를 갖게 된다. 매일 아침 다양한 분야의 뉴스레터를 받아보고, 인스타그램에서 계정을 구경하며 얻는 콘텐츠 뒤에 있을 창작자들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이 ‘자극을 영감으로’ 만드는 방법에는 어떤 게 있나요?
교정 및 교열: 김대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