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결코 굶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나라는 식문화가 발달한 편이다. 식문화라 함은, 음식의 맛이나 재료 그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에 대한 접근성'도 포함되겠다. 도시에 있다면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도보로 10분 내에 식당이 몇 개나 있는지 세어 보시길. 직접 요리를 하지 않아도 밖에 나가면 다양한 가격대의 식당이 있기에 얼마든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요새는 편의점 도시락도 퀄리티가 꽤나 좋아서 부실하지 않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다. 1년+6개월 간 머물렀던 대만은 조식과 야식 전문 가게들이 넘쳐났고, 대부분의 식당들이 아주 저렴해서 밥 걱정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일본 편의점은 또 얼마나 다채롭고 알찬가. 이런 환경에서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아도 다양하게,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로 오면 말이 달라진다. 서브웨이나 맥도날드를 제외하고는 가볍게 혼밥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다. 북유럽에서는 매일매일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는 문화가 아니다. 애초에 외식 가격이 비싸고, 코스 요리가 많다. 그래서인지 가끔 있는 지인들 모임, 특별한 날 가족 모임으로 가끔 가는 정도인 듯 하다. 친한 이웃이나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할 때도 보통 집에 초대하여 요리를 해주는 편이라고 한다. 혹은, 식사는 각자 집에서 해결하고 에프터눈 티나 잠깐 하러 집에 놀러가거나 카페에서 만나는 편이라고.
대학 시절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줄곧 밖에서 밥을 사먹었던 나로서는 이런 분위기에 처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고 맥도날드나 서브웨이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햄버거는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이고, 프렌차이즈 버거는 평생에 가본 기억이 손에 꼽기에.
호스트 아주머니 안야는 식사를 잘 챙겨드시는 편이 아니었다. 오전 11시-12시 경 일어나면 시리얼을 드시고, 저녁 취침 전에는 간단히 비스킷을 드신다. 오후 두세 시에 한 끼 정도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시는 편.
단둘이 사는 집에서, 더군다나 내가 얹혀 사는 상황에 아주머니의 요리를 매일매일 낭창하게 받아먹는 것도 스스로가 불편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주방은 자유롭게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우당탕탕 뭘 만들든 안야는 눈치 주지 않고 편안하게 대해주었기에, 그 넉넉한 마음이 아직까지도 감사하다.
이 모든 상황은 핀란드에서 매일매일 요리를 할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정신없고 빠르게 흘러갔던 서울 생활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느긋하게 썰고 끓이고 볶았던' 나날들이 소중하다.
먼저 당시 나의 생명줄이자 축복이었던,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의 아시아마켓 사진들을 몇 장 첨부해본다.
각종 양념들, 쌀, 된장, 오뚜기카레, 라면은 여기서 모두 해결 가능하다. 그 외 고기나 달걀, 야채같은 신선 식품은 집앞 S-market에서 구입했다.
지금부터 나의 요상한, 근본 없는 요리들을 소개하겠다. 조금은 민망하지만. ㅎ
S-market에서 산 닭봉과 한국 닭볶음탕 양념. 안야와 티나, 아누가 맛있게 먹어주었던..! 다행히 양념은 많이 매워하지는 않았다.
아시아마켓에서 산 Glass noodle. 중국어로는 미분(米粉). 양념은 역시 닭볶음탕 양념. 맛은 좀 신박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아시아마켓 쌀로 밥을 짓고 연어와 올리브를 얹어보았다. 집앞 S-market에서도 쌀을 팔았지만 베트남쌀이라 마음에 안 들었다. 부스러기처럼 흐르는 쌀보다는 찰진 쌀이 더 좋다.
스텐 냄비로 밥을 하는 습관이 그때부터 들어서인지, 지금 자취방에도 전기밥솥은 키우고 있지 않다.
돼지고기 카레볶음. 카레는 오뚜기 카레. 건더기를 많이 먹고 싶어서 말아먹는 카레보다 볶아먹는 카레를 선택했다.
돼지고기와 애호박 볶음. 양념은 돼지고기 불고기 양념 from 아시아 마켓.
감자 버터 볶음. 핀란드는 버터가 정말 맛있다. 빵에 발라 먹고 감자에 볶아 먹고....
시중에 파는 감자버터에 설탕이 들어간 줄 알았는데, 직접 만들어보니 아닌 것 같다. 감자는 버터랑 만나면 매력적인 단맛이 난다.
안야는 나랑 같이 사는 죄로 매일매일 사육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내가 만든 요리들을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봐주고 맛있게 먹어주었다.
나는 아주머니랑 살면서 맵찔이가 되었다. 매운 음식에 줄곧 미쳐있었는데, 핀란드에 두 달간 살면서 입맛이 많이 바뀌었다.
음식을 나누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있나보다.
음식으로 연결되었던 핀란드 여성과 한국 여성. 저녁을 먹고 두 시간 정도는 꼭 수다를 떨었던 그녀와 나의 단란한 시간들이 참 따뜻했더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