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달리기의 매력은 더 빛난다. 관광지에는 사람이 많다. 낮이면 따스한 햇살 아래 구경을 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반짝이는 불빛 아래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유명한 관광지라면 결국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대로 보기 힘들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한 번 달려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단 사람 자체가 적어서 다니는데 걸리는 것이 없다. 사람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거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뛰면서 보는 것들이, 들려오는 소리들이 시끌벅적한 곳을 다닐 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와 그 감각이 생생하게 저장된다. 천천히 한 바퀴 뛰는 것만으로 그 도시의 민낯을 온전히 보는 기분이 든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여행지에서의 달리기의 매력을 알게 된 후 항상 캐리어에 러닝화를 챙겨 다녔다. 캐리어 안에 약간의 공간을 양보하는 것만으로 내가 느끼고 볼 수 있는 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은 여행 일정 이어서 러닝 스케줄을 넣는 것이 힘들어 보일지라도 러닝화를 일단은 넣고 봤다. 휴가 5일과 공휴일을 껴서 8박 10일 정도의 여행을 갈 때는 주로 유럽, 미국 같이 먼 곳으로, 4-5일 정도 일정으로는 대만이나 일본 등 가까운 곳으로 다녔다.
이태리에서는 돌길을 조심할 것
로마에서는 러닝 투어를 신청해서 가이드의 인솔 하에 로마의 주요 유적지들을 달렸다. 여행지에서 달리기의 매력에 눈 뜬 것이 바로 이 때다. 투어는 뛰다가 관광 스팟이 나오면 멈추어서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전날에 같은 곳을 다니고서도 제대로 보지를 못했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아무도 없는 곳을 뛰면서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그 후 아씨씨라는 작은 도시로 이동했다. 로마에서의 벅찬 감정을 가지고 아씨씨에서도 이른 아침에 뛰었다. 역시나 돌길에다가 로마 시내보다 길이 좁고 경사가 심했다. 모르는 길을 제멋대로 뛰다가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그래서 피렌체로 이동해서는 달리기를 못했던 게 아직도 아쉽다. 달리기는커녕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했나 싶기도 하다. 베네치아에서는 캐리어 바퀴마저 아작 났으니, 이태리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발은 조심하고 볼 일이다.
교토를 잔잔하게 흐르는 가모가와
가모가와(鴨川)는 교토 시내를 길게 흐르는 강이다. 대학 시절 교토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뛰어볼 생각을 못했다. 나에게 가모가와는 낮에는 자전거로 갈길을 오가던 길이자, 밤에는 친구들과 맥주 한 캔을 마시던 곳일 뿐이었다. 6년 만에 여행으로 교토에 다시 갈 생각을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가모가와였다. 그곳을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이해줄까.
여행 둘째 날, 러닝화를 신고 가모가와로 향했다. 이미 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몸을 가볍게 풀고 뛰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강가 위로 탁 트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한 아침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옆에서 바로 바라본 강은 생각보다 수심이 얕아 보였다. 깊은 강이나 바다를 한 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는데, 얕아서 한없이 마음이 편안했다. 강이 평평하게 흐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낙차가 있는 구간도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은은하게 높아진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제야 예전에 자전거를 탈 때도 반대로 내려올 때는 페달을 열심히 밟지 않아도 시원하게 속도를 내며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인데 한 번의 달리기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던 순간이다. 그 후로도 몇 번 교토를 더 찾았고, 그때마다 가모가와를 뛰었다. 일과 시작 전 아침에 먼저 이 곳을 찾아 오늘도 잘 구경하고 오겠다고 다짐하는 의미의 달리기였다.
러너들의 성지, 뉴욕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는 그냥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예사스럽지 않은 규모를 자랑한다. 맨해튼의 지도를 보면 하나의 공원인데도 꽤나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공원을 한 바퀴 다 뛴다면 그 날 여행은 다 했다고 봐야 하니, 적당히 호수 부근까지만 뛰고 오는 7km 정도의 러닝을 계획했다.
아침 7시쯤 센트럴파크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분명 평일인데, 줄줄이 뛰는 사람들을 보니 마치 소규모 마라톤 대회라도 나온 것 같았다. 5월이어서 뛰기 좋은 날씨이기는 했지만, 이 곳이라면 날이 덥던 춥던 항상 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러너들의 성지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을 기꺼이 맞으며 주위의 러너들과 같이 또 따로 달리는 기분으로 달렸다. 보행로 사이사이의 넓은 잔디밭에는 풀어놓은 개들이 뛰놀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편이라 평소 같았으면 신경 쓰느라 제대로 못 뛰었을 텐데, 개들이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크게 위협감을 못 느끼고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못 봤던 다양한 종들의 개들을 구경하느라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센트럴파크를 다 뛰고 나가면서는 극강의 달기로 유명한 쿠키가게에 가서 이제까지 맛본 적 없는 단 쿠키를 먹으며 행복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큰 규모, 줄줄이 뛰는 사람들, 신기한 개들, 혀가 아플 정도로 단 쿠키. 나에게 센트럴 파크는 이렇게 기억된다. 허드슨 강변, 하이웨이 라인 등 뉴욕에는 뛸 곳도 많고 구경할 곳도 너무 많지만 역시 뉴욕은 센트럴파크다.
하노이의 번잡함에 지쳤다면 호안끼엠 호수 한 바퀴
동남아 여행은 작년에 처음 가봤다. 차라리 휴양지로 갔으면 나았을 텐데, 휴양은 내 취향이 아니라며 엄마와 둘이서 베트남 하노이로 향했다. 도로를 꽉 메운 오토바이들과 운전자들이 울리는 경적들, 지켜지지 않는 신호 등의 무질서함 때문에 거리를 다닐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스트레스만 쌓여가던 차에 그래도 나에게는 러닝화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침 일찍 러닝화를 신고 호안끼엠 호수로 향했다. 아침이라 길을 다니는 오토바이가 적어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미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마라톤을 하고 여행지에 가서도 뛴다고 하면 대부분은 나를 대단하다고 말하거나 유별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디를 뛰든지 항상 그곳을 먼저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내가 그렇게 특이한 건 아니구나. 그저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지’라는 생각이 든다. 호안끼엠 호수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바퀴를 뛰어도 3km가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이틀간 쌓였던 번잡함에 대한 피로를 한결 씻어내고 새로운 기분으로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여행지를 많은 사람들 틈에서 구경하는 것이 투명봉투에 쌓인 물건을 보는 느낌이라면, 여행지를 달리는 것은 그 봉투를 벗겨내고 물건을 보고 만지는 느낌이다. 나에게 낯선 장소를 온전히 느끼기는데에는 달리기가 가장 효율적이었다. 뛰지 않고 걸어도 되지 않느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심장 박동수를 적당히 올려주어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그 느낌을 안다면 여행 시작 전에는 역시 달리기만 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