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료한 이유는 무엇인가?

풍요로움 속에서 느끼는 무료함의 역설에 대한 고찰

by 휴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1866》의 초반부를 보면 이렇다.

출처 : https://www.swedenborg.org.uk/product/crime-and-punishment/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가난으로 개인의 목표를 중단한 채 오로지 지식인이라는 알량한 자존심만 남은 파멸 직전의 상태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분노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한 전당포 업자의 만행. 자신과 같은 가난한 자들의 조악한 물건을 담보로 쥐꼬리만 한 돈을 빌려주고 무자비하게 고리를 착취하는 노파를 보며 라스꼴리니코프는 인간이라면 차마 행할 수 없는 금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열망에 휩싸인다.

라스꼴리니코프는 결단을 내리기 직전까지 매 순간 번뇌한다. 그리고 이 불쌍한 젊은이의 고뇌가 깊어질수록 타락한 그의 영혼은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스틱스 강에 가까워진다.


풍요로움 속의 무료함


넉넉지 못한 사정으로 목표를 포기하고만 라스꼴리니코프와 달리, 요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Abundant(풍요로운)란 영어 표현보다는 Rebundunt(과도한)란 어휘가 더 어울리리라. 분명 부족함보다는 풍요 속에 살고 있다. 물질적인 윤택함 뿐만 아니라 정보의 홍수라는 축복 아래에서 탐하고자 하는 지식이 생기면 몇 번의 손가락 까닥거림으로 얻을 수 있는 꿈의 시대에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기보다 지속적인 무료함에 시달려 보인다. 이 현상은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은(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직장인들에게서 특히 많이 나타난다. 일련의 목표를 이루고 나니 삶의 동기가 증발했고 적은 의무에서 밀려오는 허전함과 외로움의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던 것이다.


그때부터 불완전한 영혼들은 완전히 방향성을 잃고 그저 유영하듯 흘러간다. 어쩌다 떨어져 나간 커다란 행성의 작은 조각처럼.

하지만 그런 막연한 이동에 기대어 살아가기에는 남은 인생에 아쉬움이 남는다.


The purpose of life


언제부턴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의 꿈이 없어도 무방하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다가 마음속 깊숙이 안착하고 말았다. 다소 위험한 발상이지만 한 세대에게 부여된 과도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측면에서 훌륭한 위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편향된 생각과 영혼의 의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줄다리기를 실패한다면 결국 기생과 숙주 관계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숭고했던 영혼은 그림자에 잠식당하면서 그 존재감 역시 쪼그라든다. 마치 자신감을 잃은 가장의 마음처럼.


만약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게 라스꼴리니코프고, 그 모습을 친구 라주미힌이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대에서 입지가 줄어들 수록 자신감을 잃고 벙어리가 되는 법이야. 그 후엔 누굴 만나든 할 말이 없고 만남 자체가 무미건조하겠지. 그러면서도 온 몸을 감싸는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고 더욱 시끌벅적함을 갈망하고 말아. 한 데 모인 비슷한 영혼들과 함께 말이야. 그들은 어설픈 공감대와 동질감으로 무장한 채 이게 인생의 유희라며 모두가 밤새도록 무의미한 곡괭이 질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는데 그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야. 술과 향락으로 쪼그라든 영혼을 억지로 아주 잠깐 부풀릴 뿐이지."


숙취에 절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한 배를 탄 동료들과 밤새 캐낸 돌멩이들을 뒤적거려 회상해보지만 그게 보석일 리 없다. 찬란함 대신 허무함이 사무친다. 무대 중심에 덜컥 주인공이 빠진 것을 깨닫는다. 아무리 유쾌하게 짜인 각본이라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The Dream painted by Henri Rousseau 1910


재치 있는 입담으로 유명한 스타 강사 김미경 님은 과거에 한 강의에서 '자신을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력하게 충고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그분의 충고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내가 먼저 키울 꿈을 가져야 한다는 선행조건이 이루어져야 한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맥락의 충고를 들으면 쉽사리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려운 변화를 따르기보다는 쉬운 반발을 택한다. 이미 숙주가 되어버린 영혼의 방어기제이자 면역작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한함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각기 때는 달라도 종착지는 반드시 정해져 있으니까.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정교한 지도가 필요하다.


음악과 명상이 영혼의 휴식이라면 꿈은 영혼의 사료다. 다시 말해서 내 영혼이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양질의 사료를 공급해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라스꼴리니코프 또한 이 정신적 사료가 끊기지 않았다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한 인격체에게 희망이 되어 줄 꿈은 중요하다.


혹시 무얼 해도 삶이 무료하게 느껴진다면 오늘 하루는 잠시 무의미하게 바라보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미래의 이상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사소한 취미의 발전이 될 수도 있고 감투나 출세일 수도 있다. 새로운 경험의 탐닉이나 구성된 가족의 행복일 수도 있다. 다만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는 것이다. '굳이 거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꿈을 찾는다는 것은 그저 잠시 무료해진 양을 달래어 정해진 목적지로 가게 만들기 위한 인생의 단출한 작업일 뿐이라고 다독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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