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장 서럽게 했던 사람이지만, 서러울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했다고 말하고 싶어.
당신과 헤어지고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은 후 아주 오랫동안 나는 일상처럼 당신과 당신과 함께한 그 순간들을 그리워했지만, 가장 그리웠던 때는 내가 서러울 때였어.
지난 봄에는 그런 일이 있었어. 경력도 깎고 연봉도 깎아 적당히 타협해서 온 회사에서 전산 실수로 그만 승진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져버린 거야. 하필이면 그 날이 사내 워크샵 날이었었는데, 나중에서야 전산 실수인걸 인사팀을 통해 알았지만, 그걸 당시에 현장에서 알리가 없었던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고 황망해서 정기 인사결과표를 보자마자 그대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버렸어. 충북 제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그 세 시간 동안 작은 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숱한 야근을 해도, 마감을 몇 번을 고쳐도, 억울한 사유로 회사에서 혼이 나거나 성과를 빼앗겨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술을 진탕 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택시 안에서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친구들의 입을 통해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들었을 때도 잘 참았는데 말이지, 그 때는 차를 몰고 돌아오는 내내 당신에게 그렇게 전화가 하고 싶더라고.
그렇게 잘 참아놓고 그 대낮에 당신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나 대리 떨어졌어~ 하고 와아앙 하고 울고 싶더라니까. 헤어지고 나서 일년 반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숱한 사유로, 숱한 순간에 너를 그리워했지만 그 순간만큼 너가 생각난 적이 없었어. 웃기지.
어른이 된다는건 뭘까. 사회에서 서러운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말해서 부둥부둥한 위로를 받고 싶은 존재가 부모님이었다면, 이제는 부모님에게는 서러움을 가장 최후까지 숨기는 것.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같아. 그런데 꾸역꾸역 어른이 되어가는 나를 한순간에 와르르 - 가장 어린 아이로 만드는 것, 그게 연인 아닐까? 나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힘들 때도 너가 생각났지만, 너를 가장 그리워하게 한 것은 나의 서러운 순간들이었어. 너는 나를 가장 서럽게 했던 존재지만, 그만큼 내가 가장 서러울 때 가장 생각났던 존재이기도 해. 이제는 연인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생각났던 걸 보면, 그 상황 자체도 참 서러웁다.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했다고 말하고 싶어
헤어진 직후에는 슬픔이, 때로는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도 하는 격동의 시기가 있다면
한층 감정의 파고가 잦아들고 난 이후로는 마치 일상처럼, 어떤 공간의 향기처럼 갑자기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지난 일 년 반동안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고 나는 항상 너를 그리워했다고 말하고 싶어.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상상은 우리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상상이야. 아직도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맞닥뜨리기 무섭고 서러워. 그래, 서럽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너를 보고도 스쳐지나갈 수 있을까.
너는 그런 우연에 많은 의미와 확신을 두는 사람이었지. 친구였던 대학 시절, 친구 관계를 망치기 싫다는 이유로 한 번 네 고백을 거절하고 서로 시간을 가지던 때, 우연히 저녁 시간대에 같은 26번 버스를 타게 되었던 날, 너는 내게 다시 한번 고백해 봐야겠다 이것은 운명인가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떤 신호를 주신 것 같다! 수준으로 확신을 가졌다고 했었지. 어떻게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에 이동하지 않는 시간대에, 평소 이용하지도 않는 버스에서 딱 맞닥뜨릴 수 있냐면서. 그렇게 소설같은 순간의 우연을 좋아했던 너인걸 알아서였을까. 나는 헤어지고 나서 항상 우리가 어디선가 마주치는 상상을 했어. 지난 일 년간은 보자마자 와앙 - 하고 내가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일 년 반이 훌쩍 지나서도 그 서러움은 어딜 가지 않나봐. 울음보까진 아니어도 주룩주룩은 될 것 같아. 너와 재회하여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싶은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닌데도, 너를 마주치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걸 보면, 너는 나에게 서러움이라는 그 단어로 남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