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기억하며
2014년 12월 28일 하늘 뜻 펴기
저는 오늘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슬픔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상황이나 기억이 떠오르시는지요? 며칠 전 저는 “아픈 마음들은 어찌하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사회선교센터 길목의 강연에서 강사로 오신 소아정신과 전문의 노경선 박사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문득문득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멍하니 앉아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많은 분들이 이런 상태일 것인데 우리는 어쩌면 좋으냐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칠십이 넘으신 정신과 전문의인 강사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그 사건 이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의사 백수십 명이 모인 자리에 간 적이 있는데 원로랍시고 한 말씀하라고 해서 연단에 선 적이 있답니다. 그때 마이크를 받기는 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데 어릴 적 한국전쟁 때 굶어 죽은 동생 생각이 나서 아무 말씀 못하시고 목놓아 통곡하셨다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서 나이 많이 잡수신 할아버지 의사의 대성통곡에서 다른 어떤 말보다 깊은 위로를 받았노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슬픔에 대한 이야기는 세월호 희생자들에 관해서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고 문익환 목사님께서 87년 6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하셨던 추도사를 영상으로 보겠습니다.
https://youtu.be/XAq5GkQQwrk?si=0SALalv2aBFP0hF1 youtube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늘 말씀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40절까지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해 시므온이 예수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이 중 34절에서 3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므온이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 마음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또한 찌를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세월호 참사로 더 이상 부모 곁에 우리 옆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호명하고자 합니다.
정차웅 군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지 않고 있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최초 신고자 최덕하 군. 최 군의 신고가 승객 172명이 구조되는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으나 최 군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선미에서 발견되었다.
양온유 양은 배가 기울고 있을 때 이미 갑판에 나와 있었으나 친구를 구하겠다고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온유 양은 사 남매의 맏이이다.
전현우 군은 여동생을 잘 챙기는 오빠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는 말을 엄마에게 남겼다.
축구를 좋아한 강혁 군은 전북 고창에 사는 할머니를 좋아해 날마다 안부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집에 오면 항상 곁에서 잠을 잤다.
침몰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한 박수현 군. 수현 군이 속한 연극동아리 학생들은 배가 기울자 단체 문자방에서 ‘다들 사랑해’ ‘내가 잘못한 것 있으면 다 용서해줘’라고 문자를 주고받았다.
“엄마 저는 꼭 사제가 될 거예요” 평화로운 아이라는 별명의 박성호 군은 성당에서 살았고 성당에서 배웠다. 성호 군의 어머니는 “너를 잃고 가슴에 비수가 꽂히고서야 엄마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가 보다”라고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현정이는 가끔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그럴 때면 친구들과 엄마 흉도 보고 심통도 부렸다. 그러나 채 10분도 안 돼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는 예쁜 딸이었다.
대나무 숲의 바스락 거림을 좋아했던 수정이는 비디오 저널리스트가 꿈이었다. 영상제작 동아리의 운영진이었고 직접 만든 동영상이 수십 개 남아 있다. 딸 셋인 수정이네는 까르르 수다가 넘쳐나던 곳이었다. 이젠 더 이상 딸들의 수다를 들을 수 없다.
강승묵 군의 짧은 삶은 음악 자체였다. 자나 깨나 집에서 음악을 들었고 여러 악기를 다루었고 작곡과 편곡을 했다. 승묵이네가 운영하던 슈퍼마켓의 잠긴 문에는 승묵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쪽지가 수도 없이 붙어 있었다.
고해인 양은 엄마가 힘들어하면 꼭 안아주곤 했다. 자기가 힘들면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했다. 해인이와 엄마는 그렇게 안아주면서 위로를 주고받았다.
주말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맥주를 몇 잔 마신 아빠가 과거에 했던 말을 꺼내면 막내딸 다영이만 재미있게 그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줬다. 군대에 가 있는 첫째 오빠, 대학생인 둘째 오빠도 귀염둥이 다영이를 좋아했다. 다영이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꿈이었다.
동혁이에게 2년 전 새엄마가 생겼다. 자신에게 정성을 쏟는 새엄마를 무척 좋아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는 새 신발을 사 줬다. 동혁이는 신발이 너무 마음에 들어 아껴 신겠다며 다른 신발을 신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동혁이의 마지막 모습은 수현이가 찍은 동영상에 남아 있다. 이 동영상에서 “엄마 아빠 내 동생 어떡하지”라며 오히려 가족들을 걱정했다.
정휘범군은 자동차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후두염으로 코를 고는 엄마와 늘 함께 잤던 휘범이. 매일 밤 10시 반이면 미술학원에서 돌아와 문을 열고 “엄마 다녀왔습니다.”를 큰 소리로 외치던 휘범이.
혜선이는 세월호에 타고 수학여행을 떠난 4월 15일 밤 9시에 엄마에게 “사랑해, 벌써 보고 싶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16일 아침 9시 배가 흔들릴 때 혜선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배가 흔들려. 구명조끼 입고 대기하래..”라고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좋지 않은 혜선이가 안경을 잃어버릴까 엄마는 노심초사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19일 만에 혜선이는 올라왔다. 하지만 엄마는 숨진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 봐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아직 불려지지 못한 이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나머지 빈칸 아직 호명하지 못한 이름들이 우리나라 방방곡곡 길목 길목마다 있는 교회, 성당, 사찰에서 잊히지 않고 불려지기 바랍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님은 사고 직후 4월 23일 팽목항에 갔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생사조차 확인 못한 아비규환의 장소에서 정신과 의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지만 그곳에서 벌어진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갔다고 합니다. 발길이 닿은 곳이 구석에 있는 신원확인소였고 이곳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답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시신이 올라오고 있었고 아이들은 밤새워 놀다 잠에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장례지도사 자원봉사자들이 하루 종일 아기 목욕시키듯 아이들을 닦아주고 얼굴의 상처를 지워주고 머리도 빗겨줬습니다. 내 자식인지 확인하러 들어오는 부모들이 받을 상처를 줄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신원확인소에서 만나는 내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란 부모에게는 죽어야만 잊힐 모습이겠지요.
아이의 교복이 택배로 올라온다는 전갈을 받은 엄마가 있습니다. 택배 기사와 마주칠까 봐 집에도 못 가고 안절부절못합니다. 자원봉사하는 수녀님과 함께 안산 어느 성당으로 유품 상자를 든 엄마와 정혜신 선생이 함께 갔습니다. 아이의 교복과 명찰을 꺼내 제단에 올려놓고 간절한 예배를 드린 후 세탁실에서 쓰러질 듯 쓰러지지 못하며 아이 옷을 구석구석 쓰다듬으며 폭우처럼 눈물을 쏟으며 빨래를 합니다. 쓰다듬는 손길이 어릴 적 아이의 엉덩이를 만지는 엄마의 손길 같습니다. 3시간여 아들과 긴 얘기를 나눈 엄마는 교복을 정성껏 다림질했습니다. 한지에 교복을 곱게 싸서 제단에 다시 올려놓고 기도를 올립니다. 아이 엄마가 말합니다. 유품을 받는 일이 제일 두려운 숙제였는데 알고 보니 아이가 보낸 선물이었다고.. 농성장 다니느라 울 시간이 없었는데.. 24시간 아이 생각만 하면서 울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아이의 교복 때문에 소원이 이뤄졌다고..
아이의 유품인 교복을 빨고 다려 제단에 올리는 의식을 가진 것이 금요일 오후 3시였는데 이때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마리아가 내려서 안아주었던 시각입니다. 2014년 어느 금요일 안산의 성당에서 성모님 같은 엄마가 예수 같은 아들을 껴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입니다. 그날 이후 눈만 뜨면 따라붙던 엄마의 두통도 사라지고 정혜신 선생의 이유 없는 어깨와 팔의 통증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치유한 것일까요?
자식을 잃은 어미와 아비를 두고 “시체장사를 하려 든다”느니, “6.25 때는 그보다 더 죽고도 말이 없었다”느니 사람 말이 아닌 짐승의 소리보다 못한 악다구니를 해대고 있습니다. 말뜻을 모르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말을 뇌까리는 저들은 어미와 자식의 사이가 갈라진 그 아프고 시린 틈에 도끼 날을 들이 밀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이익과 효율에 눈이 멀어 사람다움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온전하겠습니까?
“오직 진실만이 위로입니다.”라는 김해자 시인의 추모사 일부를 읽겠습니다. “낮술에 취해 거리를 걷는데 얼핏 환한 것이 스쳐갔습니다. 되돌아와 보니 광장 귀퉁이에 기저귀 홀딱 벗겨진 아기가 누워있더군요. 아기 아랫도리 닦아주며 웃는 아비와 젊은 어미 사이 힘차게 하늘을 향해 발랑거리는 아기 다리와 배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모두 다 그런 세월 지나왔을 겁니다. 몸을 뒤집고, 난생처음 말을 하고, 처음으로 아장아장 걷고, 처음으로 책가방을 메고…
뒤집혀진 의자. 엎어진 냉장고. 막힌 출구. 누워버린 벽. 절벽이 된 바닥. 쏟아지는 시푸른 물줄기. 허공을 두드리다 멈춘 손가락. 입술 벌린 배낭. 둥둥 떠다니는 단어장과 초코파이. 달콤한 입 속으로 들어가보지 못한 입술과 입술들. 얼마나 추었니, 아가야, 이리 오렴. 젖은 기저귀 갈아줄게. 알처럼 동그랗고 하얀 배, 너희 예쁜 배는 내일을 낳지 못하겠구나. 삶이 거짓말처럼 참혹할 때 죽음이 더 삶답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위로하려 마십시오. 유일한 위로는 진실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람들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들을 돌아보며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1) 아이들의 이야기는 한겨레신문에서 연재되었던 ‘잊지 않겠습니다’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2) 정혜신 선생님 이야기는 한겨레신문 2014년 12월 27일 자 특집 ‘이명수 정혜신의 안산 치유 일기”를 참고하였습니다.
3) 김해자 시인의 “오직 진실만이 위로입니다” 녹색평론 138권에 실린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4) 마지막 문단은 배병삼 선생님의 “한 칸의 사이” 녹색평론 139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사족: 2104년 12월에 하늘 뜻 펴기를 위해 썼던 글을 오늘 다시 찾아 읽으며 애도한다. 지금이 그때보다 나아졌나? 우린 정말 제정신으로 살고 있기는 하나? 다시 한번 묻는다. 가슴이 울렁거려 글을 더 보고 있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