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님 방북 30주년을 맞으며
91년 봄학기였는지 가을이었는지는 기억이가물하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은 괴롭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전 해인 1990년, 소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출몰하여 무소불위의 힘으로 법률과 행정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은 맞아 죽고 밟혀죽고 분신으로 저항하고 한때 시인이었던 이는 권력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들으면 소가 웃을 일이지만 시위에 참여했다고 잡혀가서 구속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물론 그 시절 시위는 과격했다. 꽃병과 페퍼포그가 늘 동행하였고 쇠파이프와 전투경찰의 방패가 합을 겨루던 것이 일상이었다. 화염병을 꽃병이라 불렀다. 아이러니 하지만 화염병에 불을 붙이고 흔드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 마치 꽃을 든 화동이 춤추는 듯하였다.
나는 이 시절을 거치며 진보진영에서의 수많은 시도가 폭력적이라는 미디어의 매도로 폄훼되고 대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비폭력 더 나아가 유쾌한 시위와 퍼포먼스가 아니고는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라 깊이 각인하게 되었다. 이태전 촛불과 가면과 그리고 유쾌한 풍자로 변화를 이루어냈으니 그러한 각인은 나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거쳐온 많은 이들이 공유한 감정이기도 하였다보다.
不恥下問이라 하였다. 배움에 부끄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광장에서 몸으로 배웠다. 십 대 소녀와 소년의 발언에서 배우고, 허클베리핀이 롹버전으로 편곡해서 불러제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도 배우고(나는 그렇게 섹시하고도 확고하게 선율을 리드해 가는 베이시스트를 이전에 본 적이 없다) 아이들과 함께 청와대 앞 통인시장에서 사 먹은 떡볶이에서 배우고 세상이 배움으로 넘친다.
89년이었다. 동주와 준하의 친구인 익환이 경계를 넘어버린 때가…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한열이형 장례식이 함께 연결된다. 아마 세상에 나와 흘려야 할 눈물을 그때 다 흘렸나 보다. 문 목사님이 한열이형 장례식에서 목놓아 부르던 열사들의 이름을 생각하면 언제나 어느 때나 그 시절이 소환된다.
지금이야 기독교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유물론에 기반한 어쭙잖은 무신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봄은 늘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홀연 어느 날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남기고 금단의 선을 넘어 버렸다. 나는 중얼거렸다. ‘할배 목사님, 미쳤나 보다!’ 하고서도 그가 남긴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91년은 도시계획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시작한 시점이다.
학부시절 배움에 소홀하였던 이유로 대학원 진학 이후 매일이 전쟁과 같은 나날이었다. 공대 오른쪽 날개에 위치한 연구실은 창문을 열어놓으면 체육관 앞에 심어진 라일락 향기가 5월의 늦은 밤에 봄바람을 타고 건너오곤 했다. ‘수수꽃다리라고 몇 번을 말해줘야 알아요’라는 아이들의 핀잔을 들어며 배움은 참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다. 하지만 한번 각인된 라일락이 수수꽃다리로 쉬이 바뀌지 않는다. 지금은 건물 짓느라 사라져 버린 라일락도 그 향기도 그립다.
도시설계 과목이었다. 팀을 이루어 도시 관점에서 무엇이던 디자인을 해내야 하는 기말 과제가 주어졌다. 지금 K대학 건축과에 있는 S교수와 함께 고민하였다. 그 끝에 나온 주제가 “종착역으로서의 서울역이 아니라 통과역으로서의 서울역”이었다.
대륙의 끝 반도의 남쪽 그나마 허리가 두동강 나 섬처럼 고립된 곳에서 나고 자라 만주로 시베리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현실이 답답하였나 보다. 그리고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어 놓아라고 백발의 문 목사께서 소리치는 목소리에 답하고 싶었나 보다. 아쉽다. 그때의 그렸던 도면 썼던 글을 도면을 포트폴리오로 남겨두질 않아서…
지금 다시 하라면 그때만큼 상상력을 펼칠 수 있을까? 배움에 부끄러움이 없을 뿐 아니라 배움을 즐기는 동기들이 오십 줄에 모여 웃음꽃을 피우며 연습한 록밴드를 보고 있자니 평화를 위한 글을 다시 써 보자는 힘이 솟기도 하다.
문 목사님 방북 이후 서른 해 가까이 지나 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이 서울역에서 평양행 열차표를 발권하고 기차를 타고 도라산역까지 가서 ‘늦봄이 오다’라는 주제의 문화제를 열었다. 늦봄통일맞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사족: 이 글은 작년 6월 늦봄이 오다라는 행사를 접하고 썼던 글이다. 오늘 우연치 않게 뉴스쇼에 출연한 문성근 배우의 이야기를 듣고 썼던 글을 다시 읽고 몇자 다듬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