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자리
TMB(Tour du Mont Blanc) 루트는 길쭉한 타원형이 북동에서 남서로 놓인 형태다. 북서쪽 프랑스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스위스,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오늘 다시 프랑스 땅으로 들어왔다. 보통 경계가 되는 고개를 하나 넘는데 오늘은 2200 고지 col de la seigne 그리고 이탈리아 프랑스 경계인 col de four 두 개를 넘었다. 사흘 연속으로 3만 보 넘게 걸으니 오후 마지막 고개를 넘을 때는 어금니가 저절로 악물어졌다. 마지막 빙하 지역을 통과하는 오르막에선 춥고 바람 엄청 불고 눈물이 찔끔 나더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경계의 고갯마루는 해발 2500이다.
오후에 썬더 스톰 예보가 있으니 아침에 일찍 출발하자고 어제 저녁식사 시간에 이야기한다. 세바스티앙은 불어로 한번 영어로 한번 내일 일정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고 아주 소소한 질문까지 성실히 답한다. 그리고 때때로 하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일행이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답변은 반드시 다른 언어로 한번 더 반복한다. 아침 7시 15분에 숙소인 엘리자베타 산장을 나섰다.
선베드에 누워 있는 사진을 보내주었더니 어부인 왈 그 자리가 원래 내 자리였던 것 같다고 문자가 왔다. 호모루덴스가 진정 나의 자리인가?
일 없으면 찾아다니며 일 만들고, 하나 하면 될 일을 서넛까지 키우면서 즐겁다고 했던 건 다 허위의식의 발로였던가! 하기야 나도 선베드에 누워 있는 게 좋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산정에 있는 선베드로 초대하는 것이 내 자리일까?
몽블랑에서의 마지막 밤은 2443미터에 있는 좋은 사람 십자가 피난처 산장(refuge de la croix de bonhomme)이다. 몽블랑 투어에서 마지막 넘은 눈물고개를 기념하고자 도착하자마자 호가든 큰 거 한 잔을 시켜서 마셨다. 아마도 오늘 마지막 밤이라 한 잔으로 끝나기 어려울 것이다.
샤워실 앞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키는 멀대같이 크지만 솜털이 보송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오늘 col de four 넘으며 힘들었다 했더니 나더러 어디서 출발했냐고 되려 묻는다. 엘리자베사 레퓨지에서 아침 7시쯤 떠났다 했더니, 자기들은 그곳에 오늘 묵으려 했는데 베드가 없어 여기까지 왔단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제 어디서 잤느냐 했더니 베르토네 산장에서 자고 새벽 6시에 출발했단다. 맙소사!! 우리 팀이 이틀 전에 머물렀던 곳이다. 다리가 몹시 아프단다. 그럴 수밖에.. 짐을 오스카에게 맡기고 차려주는 밥 먹으며 이틀을 걸어도 막판이 눈물이 찔끔 나는 코스인데 짐을 몽땅 이고 지고 36km 산길을 꼬박 12시간 걸려 왔으니 다리가 오죽하랴.. 저절로 엄마 미소가 번지며 ‘너 최고다, 수고했다, 밥은 먹었냐, 잘 쉬어라…’ 끝도 없는 칭찬과 격려가 입에서 술술 나온다. 자기는 16살이고 19살 먹은 형과 같이 왔다 한다.
생각의 자락
그렇게 환한 번개는 처음 보았다. 산장 식당은 촛불을 켜고 저녁을 먹는다. 곳곳에 필요한 전등은 있으나 모두 모션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고 충전을 위한 콘센트도 한 군데밖에 없다. 전기를 끌어오지 못해 태양광으로 물 데우고 풍력발전에 축전기 설치하여 에너지 인디펜던트 하게 운영한다. 산장 소개해 놓은 표지의 그림 보고 대충 짐작한 바이며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노새 잡이 마들렌은 여기서 멀지 않은 동네 출신인데 작고 단단한 친구다. 남북관계에 대해 한참 이야기 나누었다. DMZ에 평화올레를 만드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좋다 한다. 자기도 그 트레킹 코스 만들어지면 걸어보면 좋겠단다. 그녀는 우리 팀에 유일한 채식주의자이다.
오늘의 사족 1. 썬더 스톰을 보면서 세바스티앙 그리고 노새 잡이 마들렌과 몽블랑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와인을 마시며 보냈다.
2. 오늘도 6인실 도미토리 배정받아 스코틀랜드와 호주 레이디들과 한방을 쓰다. 천창이 보이는 자리에 이층 침대가 내 자리다. 아래에 누가 있는지는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3. 불어를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빠리 사는 10개월 동안 생기지 않다가 몽블랑 와서 불어를 좀 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