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omiti트레킹_Day+7

길 떠나기 전에 (2018. 8. 18.)

by 무위

트레킹 마지막 날은 천천히 내리막길을 내려오면서 마무리되었다. 끝까지 무릎으로 고생하던 시몬은 하산 중간에 노새를 싣고 가는 트럭으로 옮겨 타고 우리는 느릿느릿 호수가 아름다운 산골 마을 미수리나로 내려와 출발지인 코르티나 담페초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노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If you can master snow,

you can master ANYTHING”

초록색 초원 위로 잔디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사진 옆에 붙어 있는 광고 문구다.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멍청이 된다는 속담도 있다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듯 놀이가 상상의 나래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니 앞으로 다양한 놀이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상

2017년 9월 1일부터 파리에서 파견근무를 시작했으니 오늘부로 파견 기간 일 년 중에 12일이 남았다. (글을 올리는 지금 시점에서는 파견이 연장되어 내년 8월 말까지 파리에서 근무할 예정이다.)
시작은 의외로 어이없는 이유였다. 기억이 맞다면 2017년 사월 마지막 주에 과제 결과를 국제표준화 회의에 제안하기 위해 파리를 처음 오게 되었다. 학부 수업시간에 들었던 신도시 라데팡스 인근에 회의장이 있어 그 근처 어디쯤에 숙소를 잡고 아침저녁으로 라데팡스 보행자 광장을 걸어 다니며 회의장과 숙소를 오갔다. 우리가 경쟁하듯 속도를 높여 도시를 형성해온 것과는 달리 이미 80년대에 파리 신도시는 모든 교통수단을 지하 데크 밑으로 넣고 보행자를 가장 우선하여 지상 광장을 만들었다. 30년 전 수업시간에 배운 것이 눈 앞에 펼쳐지니 마음이 혹하였다.
결정적으로 주말에 짬을 내 둘러본 빠리 시가지 가로수에 매혹당했다. 낯설지 않았다. 마치 시집간 막내딸 친정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건 금방이다. 보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근무를 위해 파견지 파리에 도착해서 살 집을 구하면서부터 현실로 나타났다. 타향살이 고단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사 모든 일이 Pros & Cons가 섞여있듯 파견근무도 그렇다. 하여간 이렇게 시작한 빠리살이가 이제 일 년을 며칠 앞두고 있다.

길 떠나기 전에 무얼 채비했었나..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움직인 것 말고는 크게 괘념치 않았던 것 같다. 가족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치기는 했으나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지난 일 년 동안 이방인으로 불어를 익히기 위해 가히 사투에 다름없는 공부를 해온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삼시세끼 밥 해 먹이느라 애쓴 어부인에게는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다.

남은 여정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방학 맞아 한국으로 갔던 가족들이 빠리로 돌아오면 다시 불어 과외와 악기 교습 일정을 짜야할 것이다. 예정되어 있던 미팅과 출장을 수행해야 하고, 과제 제안서도 써야 하고 결과보고서 또한 두 개나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다.
빠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트레킹 마무리 글을 쓰면서 길 떠나기 전과 지금 그리고 앞을 다시 생각한다.

마지막 사족 1.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지난여름 트레킹 하며 적어 두었던 기록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안도가 된다. SNS가 점령한 세상에 살고 있는 업보라 생각한다. 하지만 댓글로 격려와 공감을 표시해 준 모든 친구들에게 겁나게 땡큐!!

2. 함께 한 시간이 짧아 정이 많이 들지는 못하였지만 헤어지기 전에 돌로미테의 오스카와 인사를 나누다.


3. 빠리 가려고 코르티나담페초 버스정류장에서 베니스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사십 분째 지연이다. 다음 버스와의 여유가 한 시간 남짓한데 나는 여기서 빠리까지 1200km를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도 늦고 휴가철 막히는 도로 덕분에 연결 버스를 베니스에서 놓치고 말았다.

4. 인생 뭐 별거 있나. 다른 길이 생기겠지.. 덕분에 예정에 없던 이탈리아 기차도 타보고 베니스 역 앞에서 맥주에 스파게티도 먹었으니 이만하면 땡큐!


5. 예약한 버스를 놓치고, 이를 따라 잡기 위해 베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토리노까지 가서 놓친 버스를 따라잡았으나 결국 해당 버스에는 탑승하지 못하였다. 토리노 길거리에서 노숙하여 겨우 새벽에 있는 버스를 타고 리용에 도착하다. 리용에서 두어 시간 어슬렁거리다 떼제베 입석표를 구하여 겨우 일요일 오후 파리 입성!

다음날 한국에서 온 분들과 OECD 내 다른 부서와 회의를 주선해 놓은 터라 일요일에 반드시 파리에 도착해야만 했다. 여러 다른 사정이 있었지만 각설하고 토리노 길거리에서 하룻밤 노숙하며(잠은 못잤다ㅠㅠ) 여러 상념에 잠겼다.

6. 올여름 두 번의 트레킹으로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평화의 순례자들을 위한 “DMZ 평화올레”를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트레킹이 빚어준 생각으로 신문에 DMZ 도보 다리에 관한 기고를 하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4262040025

7. 떠나기 전에 무얼 준비해야 하나. 맘만 준비하면 몸은 그냥 따르는 것인가?

서쪽으로 질주하는 밤기차에서 듣는다.

전인권의 ‘떠나기 전에’
https://youtu.be/zQap28JehP8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