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인가 사람인가

by 숲속의마음

때는 바야흐로 4~5년 전쯤 이야기입니다. 엄청난 소개팅을 하던 때예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때였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어서 시집가기만을 간절히 바랐어요. 저 역시 어서 시집을 가야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50회가 넘는 소개팅이 시작됩니다. 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다년간의 상담 경력과 다수의 소개팅 위에 쌓여갑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소개팅남 A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A는 제주의 한 스타트업 회사의 팀장이었어요.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어요. 연락처가 전달되고 얼마 되지 않아 문자가 왔습니다. 어머... 서울 남자 말투 (제주 여자인 저는 대학에 가서도 서울 남자들의 말투에 가끔 혼자 현기증을 느꼈어요)



만날 날짜를 정하고 맛집 몇 곳을 이야기하다 일단 만나 한 차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근처 한 초등학교의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주차를 하고 났더니 웬걸. 심장이 너무 뛰는 겁니다.



아... 그냥 식당에서 보자고 할걸. 처음 보는 사람이랑 한 차에서 무슨 말을 하지. 포거 페이스 포커페이스. 난 심리상담사야. 감정 조절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 할 수 있다! 웃어라. 여유를 가져라.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지만 다른 심리상담사를 찾아가서 당장 최면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 되었어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습니다.



오..... 그는 첫인상이 좋았어요. 훈남. 차에서 좋은 향기가 났고 운전을 잘했습니다. 우린 동갑이고 호흡법과 착지법과 심상화를 통해 (이 많은 것을 나의 소개팅을 위해 배웠던가) 안정을 찾은 저는 농담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와 방향제 뭐예요. 향기 좋다. 아 - 잘 모릅니다. 오늘 급하게 세차하고 갑자기... 그.. 이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저기 그게... 자,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염소 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이게 뭔 소리냐며 죄송하다고 했고 저는 그게 뭔 소리냐며 같이 웃었습니다. 뭔가 지금 생각해 보니 본의 아니게 로맨틱하네요



어쨌든 그와 차를 타고 함덕 근처 식당에 갔습니다. 노란 조명이 예쁜 곳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은데 모든 테이블이 은근한 즐거움을 풍기고 있었어요. 다코야키랑 무슨 크로켓, 크림우동 같은 것을 먹었던 것 같은데 사실 크림우동인지 , 카레 우동이었는지, 고로케였는지 튀김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납니다.



술을 한 잔도 안 했는데 분위기에 취해서 알딸딸했어요. 바깥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달려가는 계절. 자기 일을 재미있어하는 분이었습니다. 저도 제 분야의 일을 재밌어했으니 일 이야기를 하고 웃긴 얘기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었어요.



가게에서 나왔을 땐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함덕 바다를 산책했어요. 예쁘더라고요. 풍경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고요(캄캄했는데 뭐가 보였겠어요) 그냥 분위기가 예뻤습니다.



근처 야트막한 서우봉에 오르면 먼바다까지 한눈에 볼 수 있기에 우린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아 근데, 저 하이힐 신었거든요. 162인 저의 키가 하이힐의 도움으로 170 정도에 육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뭐 어떻습니다. 기어서라도 올라간다. 못 올라가 이유가 뭐냐. 같이 올라갔습니다. 안 힘들더라고요. 벤치에 앉아서 바다를 보았습니다. 마지막 연애는 언제인지 왜 끝났는지 얘기하다가 '잘못했네요.... 차일만 했다. 곱게 보내준 그분에게 감사해요 ' 같은 얘기를 하며 같이 웃었습니다.



티키타카가 잘 되는 상대와 별거 아닌 얘기를 하는 기쁨은 7센티 하이힐을 신고도 산을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내려가 볼까요? 하..... 올라오는 건 괜찮았는데 내려가는 건 진짜 난코스예요.



친구랑 있었다면 꽃게처럼 옆으로 내려가기를 선택했을 겁니다. 안전이 최고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꽃게가 되기엔... 안 돼요.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최대한 우아하게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왜인지 제 다리는 금방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후들후들 떨려요. 앞으로 고꾸라지면 망하는 겁니다.



이때! 그가! 팔을 내밉니다. 여기 잡고 내려가시면 돼.. 돼 되실 거 같가가같습니다 (염소가 또 등장했어요) 아 네네. (여기 여자 염소도 있고요)



그날 처음 본 남자의 팔을 잡고 꽂게 자세는 피한 체 산을 내려왔습니다. 해변 옆에는 바다를 감싸는 넓은 풀밭 같은 게 있었는데 자그마치 8바퀴를 돌며 이야기하다 우리는 아주 늦은 밤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랑 어떻게 됐냐고요? 그럴듯하게 흘러가려면 그 사람이 지금 내 남편이다. 하다못해 우린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다 정도는 돼야 하는데 아쉽게도 우린 그 후에 3번 더 만나고 30대 중반 바쁘디 바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잘 지내시죠? 염소 님)



봄이잖아요. 오랜만에 추억 한번 소환해 보았습니다아 _ 그 많던 소개팅의 역사. 오늘은 그중에 로맨틱 편으로 여러분을 찾아뵈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공무원이 아니라서 우리 엄마가 너 싫데' 편과 '햄버그스테이크를 먹으며 자신이 근무하는 축산과 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열강 해 주시던 남자분'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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