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입니다. 봄바람 흩날리던 지난 소개팅 이야기에이어 오늘은 다른 만남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날입니다.
바야흐로 4년 전쯤입니다. 두서없는 소개팅이 이어지던 날들이에요. 소방관인 작은아빠와 또 소방관인 외사촌 오빠가 제주의 모든 소방공무원을 소개해 줄 태세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는 사양했어요.
경험이 없는 게 아니에요. 소개팅에 친척들이 엮이면 부담이었어요. 한번 만나고 왔을 뿐인데 그래서 어땠어? 그 집은 너 좋다던데. (저는 '그 집' 이랑 만난 적이 없는데 '그 집'님은 누구죠?....)더 만날 거지? 왜 안 만나! 그 녀석 참! 3번은 만나야지!
결혼이란. 부부란. 삶이란. 관련 이야기를 10회 정도 듣고 친척분에겐 사양하자 생각했던 겁니다. 속도가 빨라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어요.
저는 이제야 안녕하세요 하는데 어른들은 양가 어머니 한복 저고리 색깔을 맞추고 계신 것 같았달까요. 네 사돈. 저는 쿨톤이라 파란색이 좋습니다. 저는 안 그래도 분홍색 좋아해요. 어머어 하하하. 빠른 전개에 숨이 차서 친척들을 피해 다니던 어느 날.
이전 직장동료가 연락이 왔어요. 그로부터 B를 소개받게 된 것입니다. B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친구는 말했어요. 외모가 네 스타일은 아닐 거야. 외모? 저는 외모를 크게 보지 않습니다. 누구의 스타일도 아닐 것 같아서 미리 말하는 거야. 의미심장한 한 줄.
누구의 스타일도 아닐 것이다. 저는 흠칫합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착한' 사람이라고 해요. 근데 착해. 좋은 친구야. 만나보면 알아. 만나봤더니, 역시 알겠더라고요. 그는 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를 쌍방 두 번 정도 했어요.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 네네 안녕하세요. 아 네에~ 안녕하세요. 네 하하 안녕하세요. 마지막 인사를 쟁취하는 자가 이기는 게임인 걸까요? 우리는 끝나지 않는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고 그가 마지막 인사를 쟁취하며 카페 의자에 마주 앉았습니다.
의자는 조금 낮았습니다. 허리를 세우고 앉으면 면접 보는 느낌이 돼요. 뒤로 기대어 앉으면 면접관 자세가 돼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몸과 마음.
B는 그 사이 주문한 커피를 가지러 갑니다. 뜨거운 커피가 지나치게 가득 담겨 컵이 찰방찰방 하고 B의 걸음걸이는 아장아장이 됩니다. 아이스커피 한 잔, 뜨거운 커피 한 잔, 케이크 한 조각이 아장아장 옮겨지고 있어요. 좋은 분이에요. 조심스럽고요.
잘못한 건 커피에요. 커피가 차 판 가득 흩뿌려져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B는 허둥지둥 커피를 내려놓습니다. 얼른 일어나 냅킨을 가져오고 컵 바닥을 착착 닦아서 제 앞에 내려줍니다. 역시 좋은 분이에요.
자 이제 케이크. 케이크가 문제인데요. 우리 앞에는 조각 케이크 1개가 있습니다. 케이크 둘레에는 소중하고 소중하게 비닐이 씌워져 있어요. B는 조각 케이크를 둘러싼 비닐을 떼어주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말했던가요. 그는 키가 아주 컸습니다. 덩치도 컸고요. 케이크 둘레에 비닐을 떼기 위해 포크를 들었는데 어머 앙증! 큰 키, 큰 덩치의 B의 손에 들린 케이크 포크가 너무나도 앙증맞습니다.
케이크도 참 야속하죠. 둘레에 붙은 비닐의 시작점도 끝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봐도 찾기가 어려워요. 비닐이 스으으윽 떼어져야 하는데 이쪽 크림을 눌러보고 저쪽 크림을 눌러봐도 떼어질 곳을 찾을 수가 없어요.
큰 손과 앙증맞은 포크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B는 좋은 분이에요. 애쓰는 모습이 고맙습니다. 저는 누구입니까! 상담사답게 자연스럽게! 제가 하겠습니다. 하하 웃으며 포크를 듭니다. 제 손에는 딱 맞는 포크를 들고 비닐을 촤라락 벗겨 냅니다. 드세요!
그와 몇 번 더 만났습니다. 그는 착했거든요.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기억나요. 그날은 영화를 보기로 했던 날이에요.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기에는 시간이 어정쩡하여 샌드위치를 먹고 가기로 했어요. 그가 샌드위치를 포장해 오겠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메뉴를 몇 개 말하다가 오후 일정이 너무 바빠진 겁니다. 메뉴를 정하지 못하고 그를 만났어요.
저어기 큰 키의 그가 샌드위치와 함께 옵니다. 근데... 샌드위치 좀 많아 보이는데요?! 뭐죠? 네... 그는 제가 뭘 좋아할지 몰라 언급했던 샌드위치를 모두 사 왔던 겁니다. '뭘 좋아할지 몰라 모두 다 준비했어' 그거잖아요. 그는 정말이지 착했던 것입니다.
착한 그와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산책을 했던가요. 그는 그날따라 말이 없습니다. 날씨는 좋았어요. 우리는 말없이 걷습니다.
그가 돌연, 저기....합니다. 저는 네? 하고요. 저희 엄마가 공무원이 아니라서 **씨 싫데요. 바람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바람이 사악 불었고 저는 걷고 있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응?!이라는 물음표가 가득 찼어요.
큰 키, 큰 덩치의 착한 남자는 저에게 엄마가 **씨 싫데요 라고 이야기하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어떻게 반응할까요?
상담자답게 '네... 그러실 수 있어요' 하면서 티슈를 건네줄 순 없는 거잖아요. 저는 근래 들어 가장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맙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해요... 흐읍.. (울지 마. 가!!!! 훠이!) 그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흡... 흐읍(울지 말랬다아! 가아!!! 훠어어이!) 네 착했던 거죠.
울 것 같은 큰 덩치의 남자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착하긴 착한데요, 이것이 착함의 정의라면 저는 착함에게 사약을 내리겠어요. 잘가라. 안녕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