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브릿지와 제임스 도노반 2편
영화 리뷰와 제임스 도노반 실제 생애
<소련과의 포로교환 협상>
이 영화의 두 번째 포인트는 포로교환 협상 과정이다.
1962년 어느 날, 미국 CIA 국장 Dulles는 민간 법무법인의 변호사로 일하던 제임스도노반을 CIA로 호출한다. 도노반에게 정부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대신하여 협상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그는 루돌프아벨을 넘겨주는 대신, 소련에 붙잡혀 억류 중인 U-2 첩보비행기 조종사 Francis Gary Powers를 넘겨 받는 포로교환 협상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게 된다.
협상의 우여곡절 끝에 베를린의 글리엔케다리(Glienicke Bridge)에서 양측은 만난다. 도노반은 루돌프아벨을 넘겨주되, 프란시스개리파워즈와 추가로 동독에 역류 중이던 젊은이 프레데릭프라이어(Frederic L. Pryor)까지 되돌려 받는 데 성공한다.
후일담으로 프란시스개리파워즈는 KNBC 뉴스에 근무하던 중 1977년 헬리콥터불시착사고로 사망하였다. 프레데릭프라이어는 1962년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Swarthmore College에서 Emeritus 경제학교수 겸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실제 인물 제임스 도노반의 생애>
제임스도노반(James Britt Donovan)은 1916년 외과의사 부친과 피아노교사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아일랜드 혈통이며, 그의 출생지는 뉴욕 브롱크스이며 출생 이후 거기에서 살았다.
본인은 영문학 전공을 희망하였으나 부친의 희망을 따라 1940년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로스쿨 졸업 후 뉴욕의 개인변호사 사무실에서 잠시 근무하였다. 1941년 Mary E. McKenna와 결혼, 한 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을 두었다.
제2차 대전이 시작됨에 따라 그는 미해군에 입대한다. 변호사자격을 가져 법무관신분으로 중령(commander)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1942년에 해군 과학연구개발본부에서 부법무관(associate general counsel)으로 근무하였다. 1943~45년에는 방첩부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IA의 전신)에서 법무관(General Counsel)으로 근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독일 뉴렌베르크전범재판에서 재판관 Robert H. Jackson의 부관으로 잠시 근무하였다.
전쟁 후 1950년 도노반은 뉴욕에서 보험법을 전문으로 하는 Watters and Donovan 변호사사무실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변호사업무 이외에 뉴욕주 교육위원회에서 부의장 또는 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1970년 심장마비로 54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영화는 소련과의 포로석방 협상이 성공하면서 끝을 맺지만 도노반의 탁월한 협상능력은 그의 인생에서 또 다른 포로석방 협상임무를 부여받으면서 계속된다. 이른바 1962년의 쿠바포로 석방협상이다. 이것은 실화다. 그의 자전적 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1962년 쿠바포로 석방협상>
포로교환협상의 성공적 수행에 뒤이어 1962년에 도노반은 정부로부터 또 다른 협상임무를 부여받는다. 바로 쿠바와의 포로 석방협상이다.
정부의 요청과 별개로, 쿠바망명자 Perez Cisneros가 도노반을 접촉해 왔고, 그는 도노반에게 피그즈만침범(Bay of Pigs Invasion) 당시 붙잡힌 1,113명의 포로의 석방협상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여기서 잠시 피그즈만 침범(Bay of Pigs Invasion) 사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9년 쿠바혁명으로 집권한 쿠바의 피델카스트로(Fidel Castro) 대통령은 소련과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쿠바의 행위는 당시 미소 간 냉전관계에 있던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미국은 CIA 주도로 쿠바망명자들 1,400명으로 구성된 준군사부대, "Brigade 2506"부대를 과테말라에 결집시키고, CIA가 자금을 대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미국은 피델카스트로 공산주의정권을 전복시키고자 추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Brigade 2506부대의 쿠바침범 작전이 바로 그것이며, 이 작전은 John F. Kennedy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1961년 4월 17일 개시되었다.
그러나 3일 만에 쿠바혁명군에게 패퇴함으로써 실패로 끝났고, 1,113명의 포로가 쿠바에 붙잡히게 되었다.
정부의 밀명과 더불어 도노반은 쿠바망명자집단의 도움 요청을 받게 되었다. 도노반은 포로들의 친척들로 구성된 쿠바가족위원회에게 접촉하여 무료로 법률서비스를 해주겠다고 했다.
도노반은 몇 개월 후 쿠바로 가서 카스트로의 신뢰를 위한 노력을 하는 등 포로 구출협상을 개시하였다. 특히, 도노반이 그의 10대 아들을 데리고 쿠바에 온 것을 본 피델카스트로(Fidel Castro)는 도노반을 환대하였다.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본인과 아들의 목숨을 저당잡힐만큼 쿠바를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마침내 1962년 12월 카스트로와 도노반은 합의문에 서명을 하였다. 도노반은 5,300만 달러어치의 식료품과 의약품을 쿠바에 제공해 주고, 1,113명에 달하는 포로의 석방을 얻어냈다.
의약품 제공카드가 협상에 효과적이었던 배경에는 도노반의 세심한 관찰이 한몫을 하였다고 한다.
도노반이 쿠바에 체류할 당시 활액낭염을 치료하고자 쿠바로부터 받은 약품을 사용해 보았으나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데서 의약품 제공이라는 협상 아이디어를 착안하였다고 한다. 즉, 당시 쿠바는 약품 조달이 극도로 열악해서 피델카스트로 마저 애가 탈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협상의 말미인 1963년 7월 3일에는 쿠바 억류 중이던 9,703명의 남자, 여자 및 어린이들의 석방도 얻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협상은 물론 혼자 한 게 아니었다. 당시 CIA 변호사 Milan C. Miskovsky와 팀을 이루어 협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도노반은 "Distinguished Intelligence Medal"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