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14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야기는 '1417년, 근대의 탄생(스티브 그린블랫 지음)'의 내용을 모티브로 하였고 영문 위키피디아 검색으로 일부 내용을 보충하여 작성한 것이다.
<수도원을 찾아 나선 책사냥>
1417년 1월, 이탈리아의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는 스위스와 독일의 수도원으로 책사냥에 나섰다.
포조 브라 치올리니
<포조는 왜 책사냥에 나섰는가?>
그는 애초에 로마교회의 수장인 요한네스 23세 교황 휘하에서 스크립토르(scriptor), 즉 문서작성자이자 필사가로 일해 왔다. 그러다가 업무에서 보여준 노련함과 명민함 덕분에 교황의 비서까지 올랐다. 그러나 교황에 중대한 변고가 발생하였다. 1417년 콘스탄츠공의회의 결정으로 교황의 지위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교황청에서 일하던 교황의 수하들은 모두 해고되었다. 포조 역시 마찬가지로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포조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대신 책사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4세기에 왜 이탈리아인들은 책사냥에 몰두하였나?>
14세기 이탈리아인들은 책사냥에 몰두해 왔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학자인 페트라르카가 묻혀 있는 대작들을 발견해 내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330년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작 ’ 로마건국사(Ab Urbe Condia)‘를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키케로, 프로메테우스 등 잊힌 고대의 걸작을 찾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이태리 아레조에 있는 페트라르카의 생가
페트라르카가 거둔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세기 동안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잃어버린 고전들을 찾아내는 일에 매달리게 하였다.
이런 열정으로 재발견된 고전들은 필사, 편집, 주해 과정을 거쳐 활발히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서 발견자들은 명예를 얻었으며, 이른바 인문학(study of the humanities)이라고 알려진 학문의 토대가 되었다. 또 인문학 연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인문주의자(humanist)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잔존하는 고대 로마의 고전들을 세심히 파고들면서 많은 책들의 전체 또는 일부가 유실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은 이들 중 일부가, 아니 어쩌면 상당히 많은 수가 이탈리아나 알프스 너머 어딘가 어두운 구석에 처박힌 채로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페트라르카는 키케로의 “아르키아스를 위하여(Pro Archia)”의 필사본을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발견했으며, 프로페르티우스의 필사본은 파리에서 발견했다.
<왜 수도원이 책사냥의 타깃이 되었나?>
포조와 동료 인문주의자들의 중요한 책 사냥터는 유서 깊은 수도원의 도서관이었다. 수도원이 책 사냥꾼들의 주목을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에 정치적으로으로나 문화적으로 번성을 누리던 서로마제국이 서기 476년 패망한 뒤, 오랜 세월, 수도원은 실질적으로 책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었다.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로마제국도 최소한 우리 기준으로 볼 때는 일반 시민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높았다. 제국이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도시는 황폐해지고 무역도 쇠퇴했다. 점점 불안해진 군중은 야만족의 군대가 출몰하는 지평선을 살피기에 바빴고, 이윽고 로마의 초등, 고등 교육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축소된 상태로나마 유지되었으나 결국은 전면적인 교육체계의 붕괴로 이어졌다. 학교와 도서관,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고, 전문 문법학자나 수사학 선생은 더 이상 일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책의 운명보다 걱정스러운 훨씬 중요한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이렇게 교육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수도원은 교육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과 윤리, 사상을 가르치는 정신적 주춧돌로 남아 있었다. 5세기 중반 서로마 멸망 이후 14세기의 르네상스시기까지 가톨릭교회가 당시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인정을 받았던 데에는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수도원에서는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수도사들에게 글을 읽도록 하는 강제 속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서기 6세기에 작성된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 회칙을 예로 들어 보자.
“첫째, 형제들이 독서를 하는 동안 지정된 한두 명의 상급자가 반드시 수도원을 순찰해야 한다. 그들의 임무는 시간을 낭비하거나 독서를 게을리하고 한가한 잡담에 빠져 있는 형제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다.”(수도원 회칙 49:17-18)
수도원 사회에서 독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엄숙한 의무였다. 독서를 하려면 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6세기 중엽에 일어난 격렬한 고트 전쟁(Gothic wars)을 겪으면서 책 생산을 담당했던 공방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책 시장도 자취를 감추었다. 수도원은 소장하는 책을 더 세심하게 보관하고 책의 소실에 대비하여 수도사들에게 책을 필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책 필사의 전제조건인 필사용지의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이집트의 파피루스 제조업자들과의 무역이 정치적 혼란 속에 중단됨에 따라 양피지 제조업이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당시 책은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로 생산하던 때였다. 결국 수도원은 새 회칙을 정해 수도사들에게 양피지를 만드는 기술을 익히게 했고 상태가 좋은 양피지는 복원하여 재사용하도록 가르쳤다. 결과적으로 수도사들은 독자이자 사서였고, 책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책 생산자가 되었다.
잃어버린 고전의 자취를 찾아 헤매는 포조와 다른 인문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 내의 수도원 도서관 대부분을 샅샅이 뒤지고 페트라르카의 예를 따라 프랑스의 수도원까지 훑은 후에 이들은 스위스와 독일이라는 거대한 미답지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포조의 수도원 도서관 첫발: 스위스의 생갈렌 수도원>
1417년 1월. 포조는 고대의 명작을 찾는 첫 발걸음으로 스위스를 선택하였다. 포조는 스위스의 콘스탄츠(Konstanz)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성 갈렌 수도원(Abbey of St. Gall 또는 Abbey of St. Gallen)으로 향했다. 성 갈렌수도원은 스위스의 콘스탄스호수(lake constance, 또는 obersee bodensee라고도 불림) 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St. Gallen에 있다.
스위스의 성갈렌 수도원
포조의 성 갈렌 수도원 방문은 벌써 두 번째로 그는 전해에도 두 명의 이탈리아인 동료와 함께 그 수도원을 방문한 바 있었다. 그때 그는 일련의 중요한 발견을 했으나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전에 동행했던 동료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성갈렌 수도원에서 둘은 별다른 발견을 이루지 못하였다. 기대했던 보물 찾기에 실패하고 두 친구는 갈라서기로 했다.
<두 번째 발걸음: 독일의 풀다수도원>
바르톨로메오와 갈라선 이후 포조가 선택한 다음 목적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학자들은 독일에 위치한 풀다수도원(Fulda Abbey) 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Fulda는 독일의 정중앙에 위치한 Hesse주의 작은 도시이다.
독일의 Fulda 위치
풀다수도원의 오늘날 정식명칭은 Princely Abbey of Fulda이다.
독일의 풀다수도원
이 수도원은 중부 독일의 론강과 포겔스부르크 산맥 사이의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데, 여러 모로 책사냥꾼들의 흥미를 일으킬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풀다 수도원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부유했고 한때는 위대한 학문적 전통으로 유명했으나 당시에는 쇠락해 가고 있었다.
’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키우스의 제자가 8세기에 세운 풀다수도원은 드물게 독립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도원의 원장은 신성로마제국의 영주였으며 그가 행차할 때는 무장한 기사들이 그를 호위하였다. 수도원 소속 수도사들은 대부분 독일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출신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원의 대성당은 4세기에 지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떠 지은 것이었다. 이 풀다수도원의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라바누스 마우루스이다. 그는 822년부터 842년까지 20년간 풀다수도원의 원장을 지냈다. 성서 주해, 교리와 교육지침서, 학술적 개론서, 암호문 형태의 시를 남긴 다작의 문필가로도 유명하다. 풀다수도원은 그의 지도아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의 전당으로 변모하였다.
라바누스는 수도원 도서관을 훌륭하게 가꾸기 위해서 노력했다. 앨퀸 밑에서 수학했던 라바누스는 앨퀸이 수집한 중요한 사본을 풀다수도원으로 가져왔다. 라바누스의 지도아래 풀다수도원은 도서관의 장서를 필사할 수 있는 필사가 인력을 대량으로 양성했고,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이 되었다.
포조는 수도원장의 협조아래 수도원 도서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주임사서를 따라 도서관으로 들어간 포조는 도서관의 장서목록을 훑었다. 포조는 역사서 천문학서 등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카루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철학자가 쓴 장편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발견하였다.
포조는 이 장편시의 서두를 읽으면서 라틴어 문장이 기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데리고 온 보조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였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
<루크레티우스는 누구인가?>
루크레티우스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로마의 오래된 명망 있는 씨족 집안으로 추정된다. 저자가 작품 안에서 귀족인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친밀한 태도로 언급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귀족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멤미우스는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아가던 정치인이었고, 카툴루스를 비롯한 여러 저명작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성 히에로니무스(340~420)가 작성한 초기 기독교 연대기 기록에서 아래와 같은 언급이 발견된다.
“기원전 94년 시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탄생. 그는 사랑의 미약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글을 썼고 일부 작품들은 키케로에 의해 개작되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세“
후대에서 이 연대기를 근거로 미치광이 철학자로 평하고 있지만, 그 연대기가 작성된 시점이 루크레티우스가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후라는 점에서 과장 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견해도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 국립나폴리박물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다수의 대리석과 청동 소재의 걸작들이 나폴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어떤 작품인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당시로서는 위험한 사상들이 담겨있는 장시였다. 형태는 시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사상을 기술하고 있는 산문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 속에는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세계에 경험하게 된다는 종교적 공포는 인간생활의 적이며, 쾌락과 미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다고 하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필사본
그리고 루크레티우스 사상의 배경이 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인데,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 의하면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무수한 원자들이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영속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여 일탈(swerve) 한 결과로써 물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Swerve, 즉 일탈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이 원서의 제목(The Swerve: How the world became modern)도 거기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일탈은 물리학의 개념에서 출발하였지만, 철학적으로는 인간 자유의지의 원천이 된다. 이와 같은 논리적 배경을 가졌던 원자론은 중세 천년 동안 금지되었던 이단의 사상이었다. 그런데, 포조가 이 책을 발견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이었다. 한 꼭지를 보자..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다.”
<포조 브라촐리니는 누구인가?>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oni; 1380~1459)는 138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지배아래 있는 테라누오바라는 벽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초 브라촐리니와 그의 어머니 야코바 사이에 태어났다. 두 누이(그중 한 명은 어릴 때 죽었다), 포조 그리고 남동생이 형제자매들이었다.
포조는 훗날 교황이 될 톰마소 다 사르차나를 일찍이 볼로냐에서 만나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1440년에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 중 하나인 '군주의 불행에 관하여'를 헌정했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포조는 서둘러 축하서신을 보내서 새로운 교황에게 모든 군주들이 완전히 불행할 이유는 없다고 썼다. 결과적으로 니콜라우스 5세의 재위기간은 매우 만족스러운 시기였다. 포조는 책사냥꾼이자 학자, 작가, 그리고 교황청 관료로서 유명인사가 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1453년 4월 피렌체의 총리 카를로 마르수피 네가 죽었다. 포조는 일흔셋의 나이에 피렌체 총리직을 제안받고 이를 수락했다. 포조는 피렌체 총리로 5년간 봉직했다.
1458년 4월, 78번째 생일을 끝내고 포조는 한 개인으로 돌아가 연구와 글쓰기에 전념하고 싶다면서 총리직을 사임했다. 포조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18개월 뒤인 1459년 10월 30일이었다.
오늘날에는 그에 대한 관심은 상당 부분 사그라졌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던 그의 무덤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사후 500주년 되는 1959년 포조가 태어난 마을은 그 고장을 빛낸 인물의 이름을 기려 '테라누오바 브라촐리니'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의 동상도 마을의 광장에 새로 세워졌다.
포조의 출생지 테라누오바 브라촐리니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책이 후세에 미친 영향과 흔적>
포조가 작업의 동반자에게 필사하게 함으로써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세상에 유포되었다. 이 책에 담긴 사상은 그 후 세계 사상의 흐름을 바꾸었다.
가톨릭교회는 얀 후스와 조르다노 브루노를 이단으로 처형하였지만, 재발견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침묵시킬 수 없었다. 결국 종교개혁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토마스모어. 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담긴 에피쿠로스철학이 인류를 절망적인 비참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유토피아는 자신의 그러한 생각을 서사적으로 펼쳐내 세밀하게 그린 일종의 청사진이었다.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가 또 다른 사람이다. 1580년대 중반, 브루노는 36세의 나이로 나폴리에 있던 수도원에서 도망쳐 나와 이탈리아, 프랑스 각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런던에 정착했다. 그는 몇 가지 다른 사상을 근간으로 자신만의 혼합물인 놀란 철학을 탄생시켰다. 놀란 철학의 뿌리로 삼은 사상중에는 에피쿠로스주의도 있었는데, 실제로 놀란 철학에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브루노의 전체 세계관을 뒤흔들고 바꿔놓았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그는 1600년 이탈리아에서 종교재판소의 판결로 처형된다. 그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브루노가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은 통제하기 힘든 형태로 변환되고, 전파되었다.
프랑스의 몽테뉴가 쓴 수상록,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반영된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그가 젝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보자. 이 문서에 탄생된 정부의 사명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복의 추구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바티칸에 소장 중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필사본은 마키아벨리가 직접 필사한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마키아벨리의 사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이 유추된다.
몽테뉴는 이 필사본 책의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음으로써 이 시에 심취했음을 증명했다.
<오늘날의 풀다수도원>
영문위키디피아 Abbey of Fulda에 의하면, 이 수도원에는 지금도 도서관과 필사실이 있다. 도서관에는 약 2천 개의 필사본을 보유하고 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등 여러 고전들이 있다.
1417년 이탈리아 책사냥꾼에 의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발견된 것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세역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13년 현재 풀다 필사본들은 분산되어 일부는 바티칸도서관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 책이 시사하는 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포조를 비롯한 중세의 책사냥꾼들이 책사냥에 나서서 고대 그리스로마문화를 복원한 시점이 근대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마틴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을 기점으로 근세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설이다. 그런 점에서 제가 앞서 소개한 책 "창발의 시대"는 이러한 역사인식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책의 원서의 제목(The Swerve: how the world became modern)에서 swerve는 일탈이라는 뜻 이외에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어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방향전환을 시사하는 이중적 제목으로 삼은 듯하다. 다만 저자 Stephen Greenblatt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영문학자이자 셰익스피어연구전문가로 꼽히는데, 그는 셰익스피어 시대 인문학을 파고들다가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퓰리처상(논픽션), 전미도서상(논픽션) 등 여러 수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