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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김 May 13. 2023

아일랜드 민족시인 예이츠의 사랑과 생애


최근 영국의 영어원서소설, "The Children Act"를 읽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영시 "Down by the Salley Gardens"가 아름답고 애절해서 이 시를 쓴 윌리엄 예이츠의 사랑과 생애에 대해 소개하기로 한다.


“Down by the Salley Gardens”는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예이츠(William Buttler Yeates)가 쓴 수많은 사랑 시중 하나이다. 그가 1889년 발간한 시집 “The Wanderlings of Oisin and Other Poems”에 담겨서 발표되었다.

윌리엄 예이츠

이 시는 예이츠가 젊은 날 실제 지고한 사랑을 했던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자.


윌리엄 예이츠는 우리나라에 이니스프리의 호도라는 아름답고 낭만적 시로 더 잘 알려진 시인이다. 



<예이츠의 출생과 아일랜드의 국가 상황>


그는 1865년 아일랜드의 Sandymount에 출생하였고, 1939년 프랑스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가 살아간 시절은 지금의 독립 아일랜드공화국이 아니라 영국연합왕국의 영토로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이다. 즉, 아일랜드는 1536년 헨리 8세가 침공한 이래 끊임없는 잉글랜드의 침략에 시달렸다. 국가 명칭이 존재했을 뿐 사실상 잉글랜드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801년 정식으로 영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200년 이상을 영국 치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영국 지배기간 동안 아일랜드는 반영국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국민들의 반영국 감정은 고조되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지배를 당하면서 한이 쌓인 것과 유사하다. 실제로 지금도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는 비슷하다..


따라서 예이츠는 마지막 17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국의 지배아래서 탄압받던 시기에 살아야 했다. 그의 시가 애절함을 담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예이츠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예이츠는 그의 일생동안 “Down by the Salley Gardens”를 포함하여 약 60여 편의 사랑 관련 시를 남겼다. 이렇게 많은 시를 남긴 것은 그의 못 이룬 사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887년, 그의 나이 22살, 그는 필생의 사랑으로 부르는 여인 모드 곤(Maud Gonne)을 만난다,


평생의 연인 모드 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고 나중에 회고할 만큼 필생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예이츠는 문학가였고, 모드곤은 독립운동가였다. 모드곤은 예이츠의 문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고, 오로지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에 몰두할 뿐이었다.


이하에서는 모드곤과의 첫사랑, 그리고 평생 동안 이어진 그녀에 대한 순정 같은 사랑, 예이츠의 문학적 업적과 생애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대부분의 글은 영문 위키피디아 “W.B. Yeats에서 번역함)


<모드곤과의 첫 만남과 사랑의 시작>


1889년 예이츠는 그의 나이 24세 되는 시기에 모드곤을 처음 만난다. 당시 그녀는 23세로 영국인 상속자였고 열렬한 아일랜드 독립운동주의자였다. 그녀는 아일랜드 독립국가를 열망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때부터 모드곤에 대한 맹목적 애정에 빠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이 그 이후 그의 시와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응답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독립운동에 그가 참여하기를 꺼려했던 것이 부분적 원인으로 추측된다.


1891년 런던에서 주로 거주하며 문학활동을 하고 있는 예이츠는 아일랜드로 여행을 가서 모드곤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거절된다. 그는 후에 ‘나의 사랑의 고뇌는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예이츠는 모드곤에게 1899년, 1900년, 1901년 3번이나 더 청혼을 하였으나 매번 거절당한다.


<모드곤이 다른 사람과 결혼>


1903년 예이츠에게 낙담할 일이 생긴다. 모드곤이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 소령과 결혼을 한 것이다. 자신의 뮤즈를 다른 사람에게 뺏긴 그녀의 결혼 소식에 대해 예이츠는 큰 충격을 받는다. 더욱이 그녀가 결혼 직전 가톨릭으로 전향한 것은 그를 더욱 놀라게 한다. 예이츠는 신교도였다. 참고로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우세한 국가였다.  


아무튼 당시 모드곤의 결혼은 예이츠에게 재앙과 같았다고 나중에 회고한 바 있다.


<모드곤의 이혼>


1904년에는 모드곤과 존 맥브라이드 사이에 아들 숀 맥브라이드(Sean MacBride)가 출생하였다. 그런데, 모드 곤 부부는 아들을 키우는 문제로 이견이 생긴다. 모드곤은 아들이 제대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 복지를 받는 가운데 육아를 하기를 희망하지만, 혁명투쟁에만 몰두해 있는 남편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둘은 결혼을 끝내기로 한다.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문제에 이견이 있어 소송은 법원으로 넘어갔고 결국 이혼으로 종결된다.


예이츠는 모드곤의 결혼 이후에도 그녀와 계속 친구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모드곤과 재회>


그리고 1908년 예이츠와 모드곤과의 친구관계가 끝나는 일이 발생한다. 그들은 마침내 육체관계를 갖게 된다. (원전: in Paris in 1908, they finally consummated their relationship. 이는 둘이 섹스를 한 것으로 해석된다.) ‘오랫동안의 사랑이 마침내 보상받았다 ‘고 묘사되어 있다. ( "The long years of fidelity rewarded at last" was how another of his lovers described the event.,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W.B. Yeats)


둘은 처음으로 육체적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발전하지는 못한다. 모드곤이 일시적 관계로 치부하고 관계진전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모드곤은 나중에, 섹스를 배제하는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예술적 이점이 있다고 말하는 편지를 예이츠에게 보냈는데, 이는 둘의 육체관계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아일랜드 민족문학 부흥운동에 관심 갖기 시작>


1896년 Lady Gregory라는 젊은 문학가를 소개받으면서 예이츠는 아일랜드 민족문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 후 예이츠는 아일랜드 젊은 문학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Irish Literary Revival movement)을 주도한다. 1899년 에이츠는 Lady Gregory, Edward Martyn, George Moore와 함께 아일랜드 연극작품 지원을 위하여 아일랜드문학극장(the Irish Literary Theatre)을 설립한다. 아일랜드 고유의 문학을 촉진하고 조성하는 운동은 아일랜드 국민의 독립정신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블린에 소재하는 아일랜드문학극장은 나중에 Abbey Theatre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다.


더블린 소재한 Abbey Theatre



<모드곤에게 마지막 청혼, 그리고 거절>


1916년, 예이츠가 50세 되던 해... 아일랜드에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발생하였다. 부활절날 일어난 부활절 봉기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에 대해 강력 진압하였고 주동자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이 와중에 독립운동가 맥브라이드 소령도 처형된다.


그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던 예이츠는 맥브라이드가 처형되었으므로 그해 모드곤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또다시 거절된다.


<조지 하이드리스와 결혼>


예이츠는 60세가 된 1926년 9월 당시 25살이던 조지 하이드리스(George Hyde-Lees)에게 청혼한다. 35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지 하이드리스는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10월 그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예이츠와 그의 부인 조지하이드리스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둘 사이에는 Anne과 Michael이라는 두 명의 자녀를 갖는다.


특히 조지하이드리스는 남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과 사랑을 보인다. 생전에 조지하이드리스가 자신의 친구에게 보냈던 어느 편지에 아래와 같은 글이 남아 있다고 한다. 


"언젠가 당신이 죽으면 사람들은 당신의 애정행각들(love affairs)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해 개의치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


1923년 12월, 예이츠는 노벨상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다. 이 아일랜드인 수상자 발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우선적으로 에이츠의 평생 동안의 문학적 업적이 지적된다. 그러나 동시에 아일랜드인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상징적 의미가 정치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된다. 왜냐하면 바로 직전 해인 1922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이다.


<후일담>


예이츠는 1939년 마지막 작품을 위해 머물던 프랑스 망통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인근의 Roquebrune-Cap-Martin에 있는 사립 묘지에 묻힌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그의 유해를 모국으로 이송하는 프로젝트가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가 생전에 부인에게 ‘자신이 사망하면 일단 그 부근에 묘지를 만들고, 나중에 사람들이 날 잊을 때쯤 나의 고향 슬라이고(Sligo)로 이장해 달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프랑스 망통 묘지에서 고향 슬라이고(Sligo)로 이송되어 묻힌다.

그의 고향 슬라이고에 있는 묘지



당시 아일랜드 외무부는 프랑스 외무부와 예이츠 유해의 이송업무를 협의하는 등 이 일을 전폭 지원하였는데 이 일을 총괄했던 외무부장관이  모드곤의 아들 숀 맥브라이드(Sean MacBride)였다고 한다. 숀 맥브라이드는 모드곤과 맥브라이드 사이에 나은 아들이었다. 예이츠와 모드곤의 인연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 관심있는 분들은 유튜브에서 "Calum Malcolm, Down by the Salley Gardens -버드나무 정원 아래에서" 음악을 청취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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