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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레시피

- 불안의 파도를 서핑하기 -

by 쿠나

어린 시절 나는 슬픔, 분노, 불안, 비참함 등 부정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던 아이였다. 그때의 나는 외로워도 슬퍼도 참고 또 참는 만화영화 주인공 ‘캔디’나, 비루한 현실을 글쓰기로 승화한 키다리아저씨의 ‘주디’, 혹은 상상력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낸 빨강머리앤의 ‘앤’을 동경했다. 현실과는 다른 세상 어딘 가에서 눈앞의 어려움을 두고도 징징거리지 않고, 만남과 우정을 소중히 하며, 노력과 투지로 끝내 자기 삶을 품위 있게 일구어 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캔디’와 ‘주디’, ‘앤’은 모두 어린 시절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부모라는 절대적 보호 장벽 없이 일찍이 거친 세상에 내몰려진 존재다. 발달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할 때, 자신과 주변인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세상을 탐색하고 모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위축된다. 내가 좋아하던 ‘캔디’와 ‘주디’, ‘앤’은 불완전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기어이 자기 정체감을 찾아간다. 이들은 어떻게 근원적 불안과 외로움을 딛고 자기를 긍정할 뿐 아니라, 타인을 긍정하며 낙관적 태도로 살아갔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대단하다.


나는 어리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약함과 미성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이런 어른이 되어야지’ 하며 주문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어른이 되면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거라고, 누구에게도 손을 빌리지 않고 내 힘으로 삶을 꾸려갈 거라고,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운명을 개척하며 살 거라고……


올해로 직장생활 27년 차 어른 독립체로서의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매일 밥벌이를 하고 있다. 나의 선택으로 삶을 만들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걸까? 살아갈수록 나를 위한 시간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해야만 하는 일을 완수해야 한다. 직장에서 피곤이 누적된 너덜너덜한 상태로 퇴근해서, 밥해 먹고 조금 쉬다 보면 쓰러져 자기 바쁘다. 나의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구조적 어려움조차 내 탓인 양 성과에 대한 압박이 조여올 때면 감당할 수 없는 불안에 치를 떤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나의 불안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억압이었다.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하면 즉시 눌러버리거나 회피하는 것으로 마음을 보호하였다. 잠시는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나, 실체 없는 불안의 위력은 억압할수록 그 힘이 세지고 거대해져서 어느 날 나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내가 도망치려 할수록 나를 와락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 불안이라는 녀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불안은,


-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조급해지는 마음이다.

- 나를 믿지 못해 드는 수만 가지 걱정이다.

- 내가 행복할 때조차 찾아 드는 집요한 방해꾼이다.

-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의심하는 눈초리다.

- 한없이 소심해져서 두리번거리는 마음이다.

-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불빛 하나 없이 걸어가야 하는 두려움이다.

-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 불안을 떨쳐내지 않고 그 마음 안에 머물러 보기로 했다. 그제야 불안이 내게 나직하게 전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진짜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야? 계속 이대로 살 거야?” 불안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감정이 아니라, 정말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내 곁을 지키고 있던 감정이었다.


미하엘 엔데의 책 [모모]는 시간의 의미에 대한 오묘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시간을 아끼고 아껴 정신없이 일할수록 왜 시간은 더 사라지는 걸까? 시간에 쫓길수록 삶은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며, 다채로운 삶의 색이 잿빛으로 변한다. 시간을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시간은 마음으로 사용할 때만 의미 있는 순간을 허락한다.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만이 살아 있는 시간이다.

이제 나는 불안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불안을 사용해보려 한다. 불안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언제든 느낄 수 있는 감정이며, 내 삶을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더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정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불안하고 속상한 일도, 감사하고 기뻤던 순간도 기록으로 남겨 음미하고 싶었다. 30일쯤 나의 기록 서랍이 채워지던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이 지향하는 동사 세 개를 발견하였다.


‘~을 좋아한다.’,

‘~이 신기하다.’,

‘~이 궁금하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조급함과 불안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스릴감을 느끼며 서핑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은 듯하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신기하게 보며 경탄하는 것이다. 아직 궁금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나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언젠가 내 삶의 안전지대가 되어주었던 직장이라는 곳을 떠나게 된다면, 직장생활 하면서 느꼈던 불안과는 차원이 다른 더 큰 불안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미래의 나에게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다.


“만약 네가 원해서 새로운 모험을 떠났다면 기어이 버틸 수 있을 거야.”

“하루하루 너의 모험에 의미를 부여해봐.”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실수하고 깨지면서 배우되, 너의 선택을 후회하지만 않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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