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5년 전 연수 차 덴마크 코펜하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그림책으로 꿈을 키우고, 커서는 그림책의 교육적 활용 가능성을 연구했던 나에게 코펜하겐은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살았던 도시라는 이유만으로도 매우 특별했다. 그때 아말리엔보르 왕궁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인어공주 상을 마주했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애처로웠던 첫 느낌이 아련하다. 인어공주 상은 아주 자그맣고 부서질 듯 연약한 소녀의 모습이었고, 그 눈은 무척 슬펐다.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기고, 노력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고, 힘들 땐 구사일생으로 구출되고, 없던 능력도 갑자기 짠 하고 생겨나는 동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탓일까? 나는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해피 엔딩 동화가 좋았다. 안데르센 원작 동화에서 인어공주는 왕자와 사랑을 이루지 못해 물거품으로 사라지지만, 디즈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끝내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 사랑을 완성한다. 인어공주는 악한 훼방꾼의 응징과 선한 조력자의 도움이라는 전형적인 동화 프레임 안에서 꿈을 이룬다.
원작 인어공주의 사랑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안데르센 원작의 인어공주는 자기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 왕자를 사랑한다. 왕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지의 세계에 온 몸을 던져야 했을 뿐 아니라, 그 세계에 어울릴 만한 모습으로 변해야 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등지고 부정해야만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갈 수 있는 사랑보다 가혹한 일이 또 있을까! 왕자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버리고 희생해야 할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 끝내 왕자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한 인어공주는 왕자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막다른 길에 내몰린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왕자를 죽여야 하고, 왕자를 살리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순간의 선택으로 나와 너의 생과 사가 갈린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살리고 싶은 왕자의 가슴에 칼을 꽂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인어공주가 잠든 왕자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어 흘린 슬픔의 눈물이었을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완성하고 떠나야만 하는 안도의 눈물이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공자》
사랑은 타자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숭고한 행위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수술한 다리에 더 이상 힘이 실리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도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 아직도 손수 장을 봐서 아버지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며 곁을 지키는 나의 엄마. 아버지와 엄마는 90세를 바라보는 장수 커플이다.
말이 좋아 삼시 세끼지,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밥상을 차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어떻게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의 끼니를 챙기며 살아왔을까? 꾸준한 엄마의 밥상은 위대하다. 입맛과 밥맛 사이를 위태롭게 오락가락하는 노년에는 매일 밥을 맛있게 잘 먹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속상해하신다. 엄마에게는 장을 보고 밥상을 차리는 것보다 아버지가 밥을 잘 드시지 않는다는 게 훨씬 힘든 일이다.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한다.
“내가 너희 아버지보다 하루만 더 살다 가고 싶어. 나 없으면 너희 아버지 불쌍해서 안 돼.”
생명을 살리는 엄마의 밥상은 65년째 풀 가동 중이다.
부모님과 마주 앉아 두 분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두 분의 사랑이 시작되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눈에는 20대의 준수한 청년 ‘준’과 야무지고 똑소리 나는 예쁜 처녀 ‘혜자’가 보인다. 혜자를 따라다니던 준, 서로 주고받던 사랑의 편지, 첫 데이트,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던 순간순간의 이야기가 반짝반짝 빛난다.
아직도 칼로 물 베기 소소한 부부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부모님이지만, 인생의 위기가 찾아 드는 어려운 순간만큼은 서로를 살뜰히 챙기고, 확실한 편이 되어준다. ‘준’과 ‘혜자’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서로를 아끼고 돌보며 살아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원작 인어공주의 사랑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의 엔딩이 어떠하든 타인을 살게 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고, 위대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세상 어떤 이야기보다 뭉클하고 재미있는 ‘준’과 ‘혜자’의 사랑을 잊지 않을 작정이다. 꼭 기억할 뿐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나의 딸들에게, 미래의 손주 손녀에게도 ‘사랑의 레전드’로 물려주고 싶다. 생명을 살리는 사랑은 이런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