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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자 미국의 설산이 보였다

2025년 6월 17일의 기록

by Kyle Lee

눈을 감자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짙푸른 녹음이 깔린 분지의 지평선을 따라 오래된 기차가 느릿느릿 달린다. 분지 아래 풀을 뜯는 소떼 사이로 몇 쌍의 말이 나란히 질주한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내가 머무르고 있을 그 방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미국에 갈 계획이었다


미국에 갈 계획이었다. 작년 가을 즈음, 아내는 나에게 미국에서 머물 것을 권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어. 내가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다녀와요.”


나는 아내에게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 옛날 절에 들어간 고시생처럼, 모든 속세의 것을 끊어내고 노트북 한 개, 펜, 노트를 챙겨 들고 미국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곳엔 내가 머무를 방이 있었고 함께 밥을 먹어줄 사촌 형제들이 있었다. 미국 서부 끝자락, 시애틀 남쪽에 자리 잡은 작은 소도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나는 사촌들과 함께 짧은 유학생활을 보냈다. 그곳에서 나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서부의 풍경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시와 소설을 썼다.


3개월 간 또 신세를 지고 싶다는 나의 말에 형은 흔쾌히 언제고 환영한다고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첫 일주일은 어디든 놀러 가자고. 멕시코 칸쿤이나 라스베이거스는 어떠냐고. 그랜드 캐년을 거쳐 LA와 샌프란시스코를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어디든 좋다고, 책상과 의자가 있는 호텔이면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눈을 뜨자 창에 맺힌 빗방울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흘러내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병원 복도는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아내의 품에 안긴 둘째가 오물오물 젖병을 비워갔다.


“3개월 후에 다시 오세요.”


의사가 말했다. 아이는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다. 출산 전부터 계속되었던 우려는 조금씩 가라앉아 이제는 아내도 나도 양가 부모님도 아이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확실히 하자는 마음에, 우리는 의사의 지시대로 아이의 발달 상황을 지켜보며 정해진 날짜에 병원에 온다.


매번 우리는 대형 종합병원 특유의 분주함에 치였다. 진료가 끝나기 무섭게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는다.




“미안해. 몇 달 후에 상황이 좀 나아지면 다시 일정을 잡아보자.”


형이 말했다. 이모, 그러니까 사촌형의 어머니가 큰 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번 미국행은 취소하겠다고 말하자 형은 자신의 잘못처럼 내게 사과했다. 그럴 필요 없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이모를 잘 돌봐달라 이야기했다. 우리에겐 또 다른 기회가 있을 테니까.


전화를 끊고 예약했던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시애틀 직행 왕복을 80만 원 초반에, 정말 운 좋게 예약한 특가 티켓이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건 나의 과한 욕심이다. 버려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이 미국에 도착하고 딱 일주일이 되었을 날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아내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뭐라도 완성해서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기왕이면 장편소설 하나 정도는 완성하지 않겠냐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 자신만만한 작품을 바로 오늘, 먼 기적소리를 들으며 시작했을 터다.


평행우주 속 나(그)는 새벽의 기차소리를 들으며 노트를 움켜쥐고 펜을 끄적인다. 나(그)는 사촌 형과 함께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오는 국경에서 경비대에 붙들렸고, LA에서 시위대와 방위군 사이에 갇혀 최루탄과 연기 속을 헤매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시애틀에서, 나는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장편소설을 쓴다.


미국에서 들려온 이모의 수술 결과는 아주 좋다고 했다. 나는 미국을 가지 않은 대신 아내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고, 하반기에 이사 갈 집을 찾아 계약을 했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다. 모든 것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빛과 어둠. 양과 음이 공존한다.


아내는 이 기회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미국에 다녀오라고.


여기는 미국
나는 장편을 쓰고 있다


방문을 닫고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불을 끄고 모니터를 응시한 채 두툼한 헤드셋을 쓴다. 꽉 막힌 귓가로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창밖으로 만년설이 쌓인 레이니어 산이 보인다.


오늘,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는 미국. 나는 장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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