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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담심리학 박사과정 첫 학기 생존기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by 카일

쉼없이 달리다 갑자기 멈췄을 때 느낄 법한 어지러움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인한 스트레스 속에서 어영부영 맞이해버린 연말. 첫 학기를 마쳐놓고도 후련함을 느끼기는커녕 영 뒷맛이 쓰다. 큰 기대 없이 유학 생활을 시작한 덕에 밀월기(honeymoon phase)라 불릴 만한 시기를 거치지 않았고, 그 덕에 기대와 현실 사이의 낙차를 마주할 일도 딱히 없었건만… 어느 것 하나 익숙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을까.



지난 글을 다시 읽다 보니,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던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내 모습이 사뭇 생경스럽다. 한 학기 동안 쌓이고 쌓인 경험이 한데 뒤섞여 엉켜버린 탓에, 지금의 나에겐 이를 말로 다 풀어낼 재간도, 자신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해가 코앞인 만큼(여긴 아직 12월 31일이다) 그럼에도 지난 일들을 잘 매듭 짓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박사과정 첫 학기를 어떻게 생존했는지 기록해두고자 한다.






수업


커리큘럼상 매 학기 들어야 하는 수업의 양은 4개. 이번 학기에는 전공 수업 3개와 실습 수업 1개를 들어야 했다. 대부분의 수업은 수강생에게 강의에서 다룰 법한 내용을 미리 읽어오게끔 한 후, 읽어온 것을 바탕으로 토론을 진행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수업 때마다 너무나도 유창한 영어로 할 말 다 하는 미국인 친구들. 그에 비해 나는 초딩보다 못한 영어로 전하고자 했던 의도의 20%도 채 전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말하기 싫어도 말을 해야 했고, (그 누구도 나에게 유창한 영어를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마음 한구석에 고요히 자리 잡은 자괴감이 툭툭 건드려졌다.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마냥, 뜬금없는 타이밍에 눈물부터 툭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도교수 앞에서 울고, 선배 앞에서 울고, 수퍼바이저 앞에서 울고, 수업 도중에 울고… 왜 힘드냐는 질문에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힘듦을 말로 옮기는 것조차 어려웠다.


얼마간 고장 난 상태로 지내다 보니,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조별 과제를 진행하면서, 얘들이 생각보다 아는 것이 없는데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과물 면에서도 내가 한 것과 미국인 친구들이 한 것에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내가 한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한 학기 수업을 잘 마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A로 가득한 첫 학기 성적을 받아들고 나니, 나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 많은 리딩을 매번 놓치지 않고 다 읽었고, 과제를 늦게 낸 적도 없고, 퀴즈도 늘 만점을 받았건만… 왜 그렇게 사서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실습


상담 실습은 2학년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상담 전공 석사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는 1학년부터 실습을 시작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졸업에 필요한 상담 시간은 450시간으로, 2학년에 실습을 시작할 경우 자칫하다간 실습 시간을 채우지 못해 1년을 더 다니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시간을 아끼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실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실습처로 배정받은 곳은 구조화된 실습 체제로 유명한 학교 상담센터였다. 개인 수퍼비전, 그룹 수퍼비전, 그룹 강의(didactics), 여기에 (첫 학기라는 이유로 줄여달라고 해서 받은) 상담 6사례와 초기면접(initial interview) 관찰 및 이에 대한 추가 수퍼비전, 아웃리치(outreach) 활동까지. 예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양의 일이 주어졌다. 거기에 더해 (개발된 지 최소 20년은 넘어 보이는) 사례 관리 소프트웨어 사용법, 각종 규정과 매뉴얼, 사례 기록, 상담 시간 기록 시스템 사용법, 상담 의뢰 절차, 복잡하기 짝이 없는 미국의 보험 체계, 보험 지급을 위한 치료 계획(treatment plan)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내용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했다.


영어로 상담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었다. 한국어로는 수십 번도 넘게 설명했을 비밀 보장의 원칙. 영어로 설명하려니 말문부터 막혔다. 수퍼비전에서는 상담 장면을 찍은 영상을 수퍼바이저와 같이 돌려봐야 했는데, 뚝딱거리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영상을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첫 상담 영상을 꾸역꾸역 다 보고 나서 수퍼바이저에게, “당신이 보기에 이게 소통이 잘 되는 것 같냐, 내가 무슨 초딩처럼 말하고 내담자도 나에게 자꾸 ‘what do you mean?이라고 되묻는데, 이게 상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라고 말하다 또 눈물이 펑펑…


한참 지나서야 상담센터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됐고, 그때부터 상담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체득하게 됐다. 부족한 영어로도 내담자의 감정을 탐색하고 이에 대한 공감을 전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백인 인구가 대다수인 Midwest 한복판인데도, 대부분의 내담자가 개떡 같은 내 영어를 찰떡같이 알아듣곤 했다. 상담을 마칠 때 상담이 도움이 됐다고 말하는 내담자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잃어버렸던 효능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실습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내담자를 만나며 내 안에 자리한 편견전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내담자의 겉모습만으로 내담자의 인종이나 국적을 지레짐작하거나, 내담자가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할 것이라 단정하는 등. 한국에 남았다면 이렇게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내담자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고, 이와 관련된 편견과 전제를 발견할 기회 또한 없었을 것이다.



연구


수업과 실습을 따라가는 데에 급급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연구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지도교수와 한 달에 한 번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는 했지만, 당장 진행하고 있는 연구가 마땅히 없었던 탓에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끝나곤 했다. 비록 경험의 양과 질은 한국에 한참 못 미쳤지만, 이곳의 연구 문화는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한국에서는 학생이 지도교수의 랩에 소속되어 그곳에서 진행되는 연구에만 참여해야 한다는 암묵적 룰이 확고히 자리 잡혀 있었다. 그 외의 일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일종의 반역과도 같았다. 지도교수와 나의 연구 관심사는 꽤나 달랐고, 랩에서 주어지는 연구 경험도 내가 하고 싶은 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느껴야 했던 답답함과 아쉬움. 그 마음이 나를 머나먼 이곳까지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지도교수와 연구 미팅을 진행할 때, 다른 교수와 협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불안을 느낄 새도 없이, 지도교수로부터 “난 territorial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생각하는 지도교수의 역할은 학생의 니즈에 따라 학생을 지원하는 것이지, 학생을 자기 영역 안에서 자기와 관련된 일만 하게끔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며… 교수마다 스타일이 다를 수 있겠지만 자기는 이렇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그간의 걱정과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소소한 성과가 하나둘 따라오기 시작했다. 사범대에서 연구 장학금을 준다기에 별 기대 없이 갖고 있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응모했는데, 운 좋게 수혜자로 선정되어 1,000달러를 지원받게 됐다. 석사과정 때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정리한 논문 2개도 투고했고, 연구 관심사가 비슷한 다른 교수에게 컨택해 다음 학기부터 협업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앞으로도 주도적으로 연구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인간관계


9명의 동기 중 30대가 나뿐인 상황. 10년 전에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던 동기 몇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들과도 비교적 잘 지내온 덕에, 나이 때문에 위화감을 느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국인 친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잘 따라가지 못하거나, 나에 대해 영어로 말하는 것이 녹록지 않아 아쉬웠던 일이 더 잦았다. 진심은 통하게 되어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전공 바깥으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만큼은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미국인 친구들은 유학생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고, 지역 커뮤니티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고. E로 시작했던 MBTI가 삽시간에 극 I로 바뀌어버린 것 같다. 한국인 대학원생 총학생회 행사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간 잊고 지냈던 한국 문화에 대한 양가감정이 건드려지는 느낌이라 살짝, 거리를 두는 중이다.


한편 국제처에서 진행했던 OT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선생님 몇과는 수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하게 됐다. 낯선 환경에 한창 적응하느라 바빴던 시기를 같이 지내고 보니 일종의 전우애가 싹튼 셈이다.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지금처럼 잘 지내기를 바라게 된다.



생활


미국도 처음, 혼자 사는 것도 처음. 얼마간 살게 될 집에 도착하고 보니 가구는커녕 침대조차 없어 난감했다. 택배 박스를 테이블 삼아 밥을 해결하며 쓰레기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 코인 세탁기 쓰는 법, 버스 타는 법, 가구를 조립하는 법, 은행 계좌 개설하는 법, 화장실 청소하는 법… 잡다한 지식을 걸음마 배우듯 차근차근. 그렇게 ‘아마추어 자취생’으로 거듭나는 데에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이 과정을 글로 다 옮기기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이쯤이면 좀 적응이 됐나 싶을 때마다 어김없이, 예상치 못한 이슈가 곳곳에서 튀어나와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주문한 가구가 오지 않아 안 되는 영어로 IKEA 고객센터와 몇 번이고 통화하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집으로 사람을 보내는 배송 회사에 분노의 메일을 써 보내고, 실수로 인출해야 할 은행을 잘못 선택해 잔고가 마이너스로 떨어져 벌금이 부과되고… 그뿐이랴. 번개 좀 쳤다고 갑자기 전기가 끊기지를 않나, 잘 되던 인터넷이 끊기는 바람에 Zoom 미팅에 못 들어가지를 않나, 풋볼 게임 때문에 20분 넘게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지를 않나, 오밤중에 건물 안 코인 세탁기를 털어가는 소리에 놀라 911에 신고를 하지 않나… 하나하나 읊는 것조차 넌더리가 날 만큼 다채로운 일들이 시시각각 생기곤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낯선 이방인으로서 겪는 문화적 충격.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 ‘이 정도면 잘 적응했다’고 느낄 때가 과연 오기는 할까 싶다. 그래도, 이 고생을 감내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모든 고생도 그저 웃으며 떠올릴 법한 에피소드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의 후일담을 웃으며 전할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오늘도 잔잔한 분투를 이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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