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세상을 그려보다
2005년 봄 갑상샘암 수술을 시작으로 아내는 약 5년 동안 전신마취를 하고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큰 수술을 연속으로 겪었다. 세 번의 죽음의 고비를 잘 이겨내긴 했지만, 아내의 몸은 한계에 달했다. 두 번째인 유방암 수술을 할 때 나는 거의 포기상태였고, 아내가 만신창이의 몸으로 퇴원했을 때 나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불행의 대명사가 되어 전문성이 없는 무차별 조언의 표적이 되어있었다.
나의 방황을 보다 못한 친구의 소개로 유명한 의대 교수인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게 되었다. 그의 질책은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제수씨의 몸은 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있다고 보면 돼. 그만큼 모든 기능이 약해져 있고, 특히 면역기능이 많이 약해져 있다는 거야. 아마 이대로 두면 또 다른 암의 먹이가 될걸. 살리고 싶으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해. 그렇다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 희망이라도 있는 거야. 현대 의학이 아직 완벽한 건 아니거든.”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걸 바꾸라고 했다. 생활 습관과 식습관, 주변 환경 무엇보다 지금 가장 스트레스받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내를 지금의 생활과 주변의 지인으로부터 격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을 했다. 모든 병의 원인이 그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동안 해오던 많은 걸 급하게 던져 버렸다. 안 되는 일에 고집을 피운다는 주변의 질타를 무시하고 그렇게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냥 막연하게, 농사를 지어 보겠다는 생각도 없이 우선 모든 생활환경을 바꾸고 그다음은 상황에 따라 대응하기로 생각을 했다. 사실은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아내가 살 수 있다는 확신을 못 했었고, 그냥 발버둥 치듯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귀촌을 결정했지만, 어디로 갈지 장소 선택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항암 약물 치료 때부터 전국의 산골을 찾아다녔다. 공기 좋고 물 맑다는 곳은 모조리 검색했고, 시간 나는 대로 현지답사를 했다. 새로운 시작의 터전을 선택하는 시간이 약 4개월 걸렸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갓지고 깨끗한 청정지역을 골랐고 주변과의 격리를 위하여 무연고 지역만 찾아다녔다. 서두르다 보니 시행착오도 꽤 있었다. 밀감 밭이 너무 멋있게 보여 제주도의 과수원을 덜컥 샀다가 ‘야 밀감 밭이 얼마나 약을 많이 치는데, 생사람도 병이 들겠다.’ 하는 소리에 포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다닌 지 약 4개월여, 강원도 정선의 산골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기 이곳 정선을 선택하고 집을 짓고 이사를 오게 되기까지 모두 9개월이 걸렸다. 집터로 결정한 곳은 앞 계곡물이 소리 나게 콸콸거리고 좁은 입구와 마치 병풍을 세운 듯 펼쳐진 주변의 소나무 숲은 환상적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올라오는 입구 외에는 절벽과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산적의 소굴 같은 지형이었다. 게다가 토질은 약간의 붉은빛이 도는 고운 황토였다. 2월의 꽤 추운 날씨였는데 마을 입구의 동강의 지류라는 지장천(川)은 물의 양이 꽤 많아 보였다.
땅을 찾아다니며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시작은 막연하게 벗어나자, 바꾸자 이었지만, 앞으로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가 필요했다. 아내의 병으로 인한 가족들의 불안감 해소, 아내의 스트레스 원인인 아이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과 포기해야 하는 일. 나의 행복, 내 아이의 행복, 우리 가족 모두의 행복에 대한 공통분모 무엇이며 그 공통의 행복은 무엇일까? 머리가 복잡해 왔다. 한동안은 아이가 우연히 또는 병으로 사라지길 바란 적이 있었던 내가 이제는 아이와 아내 하나라도 힘들면 못 살 것만 같았다. 병과 죽음이라는 위협 속에서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내 아이의 삶에 대한 방법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아내가 죽을 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몇 가지 조건을 생각했다. 먼저 아내의 안정을 위해 연고가 없고 주변 지인들이 오기 쉽지 않은 곳, 초경쟁사회의 연습장인 입시 위주의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 자연조건이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청정지역,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동물과 식물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곳, 마지막으로 아이의 미래에 대한 꿈을 꿔 볼 수 있는 곳(이때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을 농업이라고 생각했다) 등 여러 가지를 나름대로 고려하고 정선의 산골을 선택한 것이었다.
한참을 땅에 대한 내 설명을 듣던 아내는 살포시 웃는다.
“그럼 우리 개도 키워?”
“당연, 시골에서 개를 안 키우냐? 강원도 산골이니 야생동물이 좀 있을 것 같아서 풍산개 암놈과 수놈 한 마리씩 부탁해 놨어. 풍산개 3 마리면 호랑이도 잡는대. 그리고 텃밭 농사도 하고 닭도 토종닭으로 키울 거야.”
웃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우리 땅이 마치 산적소굴처럼 아늑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내는 신이 나서 설명하는 내 모습이 좋았는지 자꾸 웃어준다. 궁금해하는 아내를 위해 의사의 허락을 받고 초봄에 현지답사 계획을 세웠다. 한 번에 갔다 오기 어려울 것 같은 아내의 체력을 배려해 근처의 콘도를 예약하고 2박 3일로 답사 계획을 잡았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여행 가듯이 신나게 출발했다. 병실에 누워만 있다가 하는 정말 오랜만의 여행에 아내도 좋았는지 아이와 떠들고 논다. 오랜만에 행복해 보였다. 스키장이 폐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용한 콘도에는 겨울의 치열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기 위해 굴착기 작업을 한, 벌겋게 속살이 드러난 황량한 집터 자리에 아내는 황당한 표정이다. 나는 주변의 소나무 숲의 피톤치드가 아내의 건강을 찾아 줄 거라 설명했고, 아내에게 남향을 가르쳐 주었다. 집이 들어설 위치와 텃밭 할 곳, 정원, 개집과 닭장이 들어설 곳 등을 이야기하는데 아내가 추워한다. 공기가 맑아서 그렇다고 말하고 차로 돌아왔다. 아내는 뭐가 뭔지 모르겠단다. 그리고 아내 특유의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이 시기에 특히 그런 표정이 많았다. 나중에 집이 지어지면 아마 좋을 거야. 원래 겨울에는 집을 짓는 게 아니래. 4월부터 집을 지으면 6월에는 입주가 가능하대. 힘이 드는지 눈을 감는다. 콘도로 돌아오는 한 시간 거리를 아내는 계속 잔다. 요즘 아내는 체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조금만 움직이면 저렇게 잔다. 약해진 몸의 생존본능이 휴식을 부르는 모양이다.
이사는 예정보다 한 달가량 늦어졌다. 이사 때도 근처의 콘도에 2박을 하고 이삿짐을 옮겨 정리한 다음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준비시켜둔 풍산개와 토종닭은 예정대로 입주가 됐고 우리의 산골 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미리 씨를 뿌려둔 코스모스가 제법 꽃을 피웠다. 주변의 정리는 조금 덜 됐지만, 약 300여 평 정도의 코스모스 밭길을 끼고 올라가면 소나무 숲 가운데 자리 잡은 하얀 집이 꽤나 멋있었다. 아내는 황량하던 이곳이 이렇게 예뻐질 줄 몰랐다고 너무 좋아한다. 이렇게 시작된 도시와의 격리된 생활은 처음엔 뭔가 빈 듯이 허전하고 불안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마을 분들은 한두 분씩 손에 뭔가 먹거리를 들고 구경하러 온다. 우리가 처음 이 마을에 살러 들어온 외지인이란다. 새카맣게 탄 얼굴들이지만 너그럽고 여유롭다. 아내는 다들 웃는 얼굴인 것 같아 친근해 보인단다. 그래 자기들 것 외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이 저리 편안해 보이는 것이다. 나도 마음 비우기 연습을 시작해야 했다.
이사 온 지 20개월쯤 후 아내는 그동안 힘든 삶의 여정 중에 곪았던 종기가 터지듯 마지막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암이 아닌 다른 병의 수술, 큰 수술이었음에도 불행의 질긴 끈을 끊어내는 마지막 수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정을 끝으로 나는 다시 행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수술 후 아내는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산골의 맑은 공기와 자연의 기운은 서서히 아내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고, 느리지만 아내는 혈색을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할 때였다. 따뜻한 햇볕이 드리워진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던 아내는 갑자기 ‘나 오래 살 수 있을까?’ 한다. 아내는 자신의 건강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연이은 수술과 투병 생활에서 자신을 잃은 것이었다. 힘없는 눈빛으로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한다.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는 나에게도 처연함을 주었고 억지와 오기를 부리게 했다.
“뭔 소리야, 오래 살아야지. 어떻게든 오래 살아서 우리 아이들 잘 사는 거 봐야지. 죽더라도 그때 죽어야지. 내가 지금부터 ‘상욱이 나라’ 한번 만들어 볼게. 상욱이를 위한 농원과 상욱이가 잘 살아갈 수 있게 뭔가 만들어 볼게. 그때까지는 죽어도 죽지 못해. 누워있더라도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해.”
나는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막연하게 내 아이를 위한 세상을 이야기했고, 나의 황당한 상상과 억지스러운 강요에 아내는 그냥 행복해한다. 공동체의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아내의 눈을 보며 말한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장애라는 이유로 남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살지 말자.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해서 비참해지지 말고 살아가자. 상대적인 열등감으로 그것이 불행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살아가자. 조건은 극복의 대상이지 그 자체로 불행인 것은 아니야. 알았지”
지금부터 우리는 삶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눈치 보지 말자. 지나가는 누군가의 말에 위축되지 말고, 위로한다고 던지는 말에 상처 받지 말자. 우리끼리 행복하자고 말한다. 그렇게 나의 행복 찾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