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세상을 그려보다
정선읍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우리 집이 자리 잡은 곳은 그야말로 오지(奧地)였고 청정지역이었다. 집은 산의 중간 턱, 해발 400m 높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앞이 탁 트여 산들이 첩첩이 겹쳐 보인다. 집 지으러 온 목수는 집터가 정말 좋다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린다. 배산임수(背山臨水)란다. 그런 건 몰라도 집 앞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산들과 계곡의 물소리가 마음을 맑게 씻어 준다. 동네 분들이 도시 사람 구경을 왔다. 순박해 보이는 동네 분들은 어떻게 이런 산골로 들어왔냐며 직접 농사를 지은 수수며 양배추 등의 농산물을 조금씩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 왔다. 그들의 방문에 우리는 역시 시골 인심이라며 앞으로의 삶이 따뜻할 거라 이야기한다. 그들이 가져다준 먹거리도 정말 싱싱하고 맛있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환경에 우리는 캐나다에서처럼 아침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운동을 나가는데 동네 분들은 벌써 밭에 나와 일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면서 보니 밭에다 뭔가를 뿌리는데 그 냄새가 아주 역했다. 제초제와 살충제를 지나다니며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뿌린다.
귀농 전 아내의 병문안을 와서 암의 원인이 먹거리의 심각한 오염이라고 주장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라는 회사가 개발한 '라운드 업'이라는 제초제가 있다. 그 제초제에 들어가는 주요 성분인 '글리포세이트(glyphosate)'라는 화합물이 암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체에 여러 가지 극심한 피해를 준다.”
라고 강력히 말하며 유기농 식품만 먹으라고 했었다. 최근에는 제초제의 '글리포세이트'라는 성분이 자폐증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기사를 읽어 본 적도 있었다. 주변 농민들의 제초제와 살충제 사용의 실상을 직접 보게 된 나는 우리 가족의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직접 텃밭 농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우리는 운동을 끝내고 오후에 바로 텃밭을 만들었다. 괭이로 땅을 다듬어 밭의 모양으로 골을 파고 돌을 골라냈다. 오래 묵은땅인데도 흙이 보슬거리고 좋아 보였다. 읍내에 나가 토마토와 10여 가지 채소의 모종을 사서 심었다. 강원도 산골이라 모든 작물 재배의 시기가 조금씩 늦어 시장에 모종이 아직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처음이라 수확이 어느 정도 될지도 모르고 또 잘못 심어 죽을까 두려워 토마토는 50여 그루나 심었다. 환영의 뜻인지 땅이 좋아서인지 토마토가 우리 식구가 먹기에 감당 못 할 정도로 많이 달렸다. 우리도 먹고 닭도 먹이고 했는데도 너무 많이 남아 아내의 병원 길에 서울의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토마토만 주기 그래서 우리 식구가 먹기에 남아나던 우리 토종닭의 유정란과 각종 쌈 채소 등을 조금씩 나눠 주었는데 맛있다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가족의 건강 문제와 더불어 내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고민은 내 아들의 앞으로의 삶에 관한 문제였다. 많은 사람이 불쌍한 장애 아이들에게 직업이라는 경쟁과 노동의 장으로 몰아내지 말자고 한다. 직업을 단순한 노동과 생계를 위한 방법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면 그게 옳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장애인의 인권 문제를 ‘보호를 명분으로 사회에서 격리해서 해결하려는 방법’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발상은 문제의 근원인 가해자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를 격리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이 사회에 참여시켜야 한다. 장애가 있든 없든 이 사회에 참여해서 역할을 갖는 것이 직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집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직업은 생계의 수단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사회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대부분 사람이 직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자각하고 동료도 친구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에게 직업이 있는 삶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이 담보되는 건강한 먹거리와 아이의 직업, 이 두 문제가 농원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으로 아내의 병도 좋아질 것이고, 나 또한 내 아이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후회 없는 인생이 될 것이다. 그렇게 농원은 꿈으로 시작됐다. 농원을 운영하며 수익 활동을 하고 아이를 영농후계자로 만들어서 꾸준히 가르치면 뭔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생각이 시간이 가면서 확신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농원을 활성화해서 같이 일할 수 있는 친구도 만들어 주고 동료도 만들어 주자는 계획도 설계했다. 나는 정선 초보 농부 ‘상욱애비’로 스스로를 호칭하며 각오를 다졌고, 농원의 이름을 ‘정선 자연 햇살 농원’이라고 정했다. 이제 더는 도망가지 않고 세상을 핑계 대지도 않고 당당하게 ‘상욱애비‘로서의 책임지는 삶을 살리라.
그렇게 농원은 처음부터 내 아이의 삶을 염두에 두고 기획하기 시작했다. 이 농원에서 동료도, 친구도 만들어지고 직업도 생활도 해결이 되어야 한다. 농원은 작은 마을이자 기업이고, 공동체적인 생활 형태를 가져가야 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들을 돌봐주는 형식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서로의 역할을 하며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는 형식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최소한, 이 농원에서는 장애로 인한 사람의 구분이 없어지고 장애로 인한 박탈감이 없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초기에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이유와 동기가 필요했다. 나는 수익구조와 공동생활이 주는 삶의 질에서 동기부여를 찾기로 했다. 그래서 먼저 농원의 수익구조를 만들고 삶의 질 부분은 천천히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해가며 만들어 가자고 생각했다.
아내의 병을 경험하면서 먹거리의 독성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유독성 먹거리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먹는 먹거리 대부분은 관행농법으로 생산한 농산물이다. 관행농법은 재배작물에 방해되는 식물을 죽이는 제초제와 곤충을 죽이는 살충제를 쓰고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농사를 말했다. 시골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이야기의 농약이 바로 이 제초제와 살충제다. 농약 살포 후 자연의 정화작용으로 농산물에 남아있는 독 성분은 비록 소량으로 법정 허용치의 범위 내이지만, 이 독성분들이 함유된 먹거리를 우리는 먹고 있었다. 아내가 병원에 있을 때도 의사 중 아내의 몸이 약해진 이유의 하나로 이 먹거리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부터 생각했던 독성이 없는 먹거리를 이제 농원에서 생산해 보자고 생각했다. 다국적 기업들의 종자 개발, 생명공학 기술 개발 등과 유전자 변형 작물(GMO) 등이 무차별 확산하는 앞으로의 먹거리에 역행해서 자연의 방식으로 청정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 우리 농원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농원의 경쟁력을 청정지역의 착한 먹거리로 정했다. 자연의 자회사로 농원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이듬해부터 기술센터의 친환경 대학에 가서 유기농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기농을 위한 퇴비 만들기와 살충제 없이 방제하는 법, 병 확산을 막는 법, 수정시키는 법 등을 배우긴 했지만 대부분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거나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었고, 유기농에 가능한 농약 활용법에 관한 강의가 대부분이었다. 농업이란 농산물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사업을 말한다. 사업이란 투자 대비 이익 창출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유통구조나 농산물의 판매방식으로는 소규모 농업의 사업성은 탐탁지 않았다. 더더욱 유기농업은 투자 대비 생산과 수익률에 있어서 좋은 사업이 못 되었다. 결국, 우리 농원만의 새로운 운영방식이 필요했다. 생산과 유통, 홍보와 마케팅 그리고 고객관리 등으로 크게 나눠 현재의 농업 현실을 분석하고 우리 농원만의 시스템을 구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