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세상을 그리다
귀농 후 나는 농원을 운영하며 꾸준하게 공동체에 관한 공부와 알아보기를 지속해서 했다. 블로그도 만들고 카페에도 참여해 내 의견을 올렸다. 관련 모임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 관심사는 장애라는 주홍글씨로 만들어진 부당한 사회의 개선에 대한 현실적인 방법론이었다.
공부 도중 알게 된 홍성의 홍동 마을은 무너지는 공동체의 대안을 농업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1958년 풀무학교라는 농업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시작된 곳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농업과 교육을 기반으로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요즘의 내 주된 관심사인 농업과 교육이 공통분모였다. 서둘러 방문했고 거기서 젊은 행동가 C 선생을 만났다.
그는 ‘꿈이 자라는 뜰’이라는 방과 후 교실을 학습장애 청소년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었다. 잠깐의 만남으로 나는 그에게 선한 영향력을 느꼈다. 그 후 그에게서 ‘장애와 농업 다리 놓기’ 공부 모임에 초대받고 간 적이 있었다.
정선에서 홍동마을까지의 거리는 300km 정도였지만 바로 연결된 고속도로가 없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그랬다. 그나마 길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공부 모임은 젊고 의욕에 찬 모임이었다. 모인 분들 면면이 다양했지만, 같은 목적을 가지고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젊고 밝은 기운이 역동하는 분위기 속에서 4시간여를 보내고 저녁을 먹고, 생맥주를 한 잔씩 했다. 가벼운 술자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 준다. 나는 먼저 나부터 허물어버리고 사람을 사귄다. 사업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고 그 방법이 나는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감추면 상대도 나에게 문을 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선의 농원의 취지와 우리 아이들도 참여가 필요하고 그 시작이 일자리라는 이야기를 막 꺼내자마자 경기도의 한 지역 모임의 회장이 불편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굳이 우리 아이들에게 일을 시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사는 것도 힘이 드는 아이들인데”
그는 그냥 잘 돌봐주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과 노동 등의 힘든 일은 우리가 하고 우리 아이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자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아이가 중증 장애라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거동도 제대로 못 하는데 일은 무슨 일이냐고 항의하듯이 말한다. 눈에 물기가 보이며 자학하는 듯 뱉어내는 말투가 가슴에 저민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 아프다.
일에 치인 사람에게나 휴식이 필요한 것이지 매일 그것도 친구도 동료도 없이 혼자서 있는 삶의 방식이 당사자에게 편한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가? 안전을 볼모로 한 비장애 부모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사육이란 삶의 방식이 권장할 만한 방식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사회는 누구든 장애라는 주홍글씨에 낙인찍히고 나면 이 사회에서 자리를 빼 버렸다. 사고로 발생한 후천적 장애인도 그런데 타고난 선천적 장애의 경우는 아예 처음부터 자리가 없었다. 교육도 직업도 없이 그냥 성인이 되었을 때 안전을 담보로 한 격리 보호시설로 보내는 외길 순서다.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의 과정은 장애인 당사자나 그 보호자가 인간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을 포기하고 격리 보호에 순응하는 세뇌 과정인 것이고 격리 보호에 적합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렇기에 많은 장애아이의 부모들이 절실한 심정으로 아이들을 포기하자고 한다.
"우리 아이들을 인제 그만 놔둡시다. 우리 아이의 장애를 이제는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이제는 그만 인정합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이제 억지를 그만 부립시다. 그냥 이 아이들을 잘 보호해 주는 쪽으로 생각합시다."
참여라는 이유로 힘든 경쟁으로 몰아내지 말자고, 그들은 이것이 운명이니 받아들이고 이들을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격리하고 보호하는 시스템이나 잘 만들어 보자고 한다. 지능이 떨어진다고, 조금 병약하다고, 주어진 조건이 열악하다고 이들의 가능성을 지워버리자고 한다. 장애가 모든 것에 대한 포기의 이유로 명분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발달장애 자녀의 부모들은 내 아이가 나보다 하루만 더 일찍 죽기를 소원한다. 아이의 장애가 원죄인 양, 부모가 끝까지 돌봐야 한다고 숙명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당사자에게나 부모에게나 모두에게 극단적으로 불공평한 일이다.
내 아이가 고등학교 때쯤 나는 영월로 귀농한 C 네 가족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집으로 찾아왔고 공통분모는 다운증후군 아이였다. 갓 7살인 아이는 내 아이의 어릴 때와 비슷했다. 아이 엄마는 심장 수술을 시기를 놓쳐 못 시켰다고 했다. 한숨을 쉬며 심장 수술을 못 한 이유를 얼버무리는 아이 엄마를 아내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안아준다.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 졌다. 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이 아빠도 따라 나와 담배를 문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가 좀 무감각해질 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때부터 C의 가족과는 다운증후군이라는 공통분모로 친밀감을 느꼈고 1년여를 가까이 왕래하며 지냈다. 서로 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들 또한, 귀농한 도시 사람이어서 말도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동지가 필요했던 나는 젊은 그가 좋았고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면 했다. 그도 나를 형님으로 부르며 따랐다. 만나서 서로를 이해시키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만나고 집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핵심을 피해 겉도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만나 헤어질 때 항상 아쉬움이 조금씩 남는 것 같았다. 그때는 단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 나는 아이의 미래와 행복에 초점을 두고 말했고 그는 현재의 자신들의 삶과 행복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내가 만난 대부분의 장애인 부모가 그랬다. 그 차이를 그때는 몰랐다. 나는 내 아이가 행복해야 우리 가족도 행복할 거라고 믿었고 그는 자신들의 행복이 아이의 장애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산골생활이 외로웠던 탓인지 C는 내 아이를 무척 잘 따랐고 또 내 아이는 그 애를 마치 친동생 돌보듯이 돌 봤다. 어른들은 서로 입장으로 설득하려고 했지만, 아이들은 그냥 서로 좋아하는 것이었다.
C네 집은 우리 집보다 더 깊이 숨어 있었다. 몇 번을 왔지만 길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 비포장도로에다 사람의 왕래가 적어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면 울창한 숲 사이로 제법 멋진 통나무집이 나온다. 바비큐 준비를 하던 C의 아빠는 반갑게 맞이한다. 산골의 저녁 만찬은 언제나 그렇듯 즐거웠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필수품인 바비큐 그릴에 참숯으로 구워 먹는 고기는 과식을 부른다. 의기투합하며 보낸 시간이 꽤 흐르고 아내가 늦었다고 그만 집에 가자고 한다. 어두워지면 무서울 것 같단다. 아이들은 헤어지기 싫어하고 부부는 자고 가라고 잡았다. 왠지 피곤한 표정으로 아내는 오늘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서두른다.
집에 와서도 아내는 한참을 말을 안 했다. 뭔가 기분이 틀어졌나 눈치가 보였다. 아이가 잠이 들고 아내는 이제 그 집에 가지 말자고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무섭다고 하며 아이가 불쌍하단다. 아내는 아이 엄마의 전화 통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수술을 안 해도 죽지 않아. 이럴 줄 알았으면 수술할 걸 그랬어. 몸이 약해서 우리만 힘들게 해. 자꾸 코피를 흘리고 병원을 자주 가. 그러니 자기는 수술하는 게 좋을 거야."
다운증후군 아이를 가진 후배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조언하는 C 엄마의 통화 내용은 길었고 아내는 화장실에서 나올 기회를 놓쳐 통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고스란히 다 듣게 되었단다.
"어떻게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그렇게 하려고 해?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당당하게 남에게까지…."
말을 다 맺지도 못한다. 마치 아이의 친모처럼 흥분해있다. 아내에게는 아직도 그 옛날 아이 심장 수술 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너무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럴 거야. 그들을 이해해야 해.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이건 누구 하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의 죽음을 원하는 세상의 문제야."
아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세상이 지옥이라고 자식을 버리나? 그게 어떻게 엄마야? 어떻게 하든 지옥에서 탈출시키려고 하는 게 엄마지, 그런 엄마들이 모여서 세상인 거잖아."
아내가 옳다. 주눅이 들어
"그래도 당신 같은 엄마도 있잖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 생각이 나서였다.
아이의 발달장애를 판정받는 순간 부모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주변에서의 위로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험난한 길을 확인시킬 뿐이다. 관련 전문가들과의 상담 또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포기하고 적응하는 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아이의 삶에 대한 미래 구상이나 희망 따윈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교육에 매달려 보지만 전문적이지 못하고 방향성이 잘못된 교육의 효과에 실망을 거듭 체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지나 학령기에 접하고 교육과정을 겪는 사이에 포기에 포기를 거듭하면서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나라가 우리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울부짖는다. 어느새 아이는 포기하고 아이에 대한 부모의 최소한의 의무만 생각하고 그 의무 또한 투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내 아이의 주도적인 삶이 아니라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이의 장애로 인한 억압받은 내 삶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물론 둘 다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 때문인데 아이의 장애 탓만 한다.
이런 과정을 겪는 동안 아무도 아이의 처지에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를 보면 건성으로 천사 등으로 부르고 한숨을 쉰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휴….’로 시작되는 아쉬움의 소리가 나올 때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은 저주와 절망의 어두운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살아가는 전 과정을 실망과 낙담 포기 등 저주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 정신적인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저주받고 잠이든 숲 속의 잠자는 공주가 차라리 부러울 정도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축복은 없고 원망만 받는다.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기초사회교육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들어가 행동과 체험으로 세상을 배워나가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거의 박탈당한다. 부모의 왜곡된 사랑이 낳은 과잉보호다.
초등학교부터는 가장 활발히 사회를 배우고 자신을 만들어 가는 시기에 몸에 맞지도 않는 교육과정을 접한다. 그 과정을 겪으며 온갖 차별을 당하고 정신적인 폭력을 당하며 거기에 적응한다. 그리고는 당연히 폐기물 처리하듯이 분리수거당하고 또 그걸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 과정에서 모순은 없는 건가? 나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부성애라는 명분과 권한을 가지고 내가 아이에게 가장 큰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싶어 가슴이 아팠다. 나는 내가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장애라는 주홍글씨의 선봉장으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탓하랴. 세뇌된 사회 인식 속의 장애에 대한 몰이해가 가족이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어 모두의 불행을 낳은 것이다.
사회가 내린 장애라는 판정은 그렇게 이 아이들을 저주의 늪에 가두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