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욱애비 Dec 17. 2020

신문 예찬

반장 이야기 3부

신문 예찬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체부가 왔나 보다. 여기 정선에서는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준다. 올해부터 신문이 오기 시작하면서 매일 우체부가 온다. 상욱이가 신문을 받으러 뛰어나간다.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어느덧 정선에 온 지 8년, 우리 가족이 자리 잡은 이곳은 특히 사람이 드문 조용한 곳이다. 사람 소리는 거의 들을 수도 없고, 가끔씩 부는 바람 소리, 빗소리가 전부이고 야생 짐승들의 암컷이나 수컷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하는 곳이다. 너무 조용하고 한적해 풍경을 사다 달기도 한 생활을 8년 하고 나니 이제 차 소리나 기계음 소리는 어색해지고 자연의 소리에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여기 오기 전 벤처사업을 했었던 나는 ‘정보가 곧 실력이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 이유로 습관처럼 일과는 무관하게 모든 일에 무차별적으로 남보다 먼저 정보를 취득하며 살고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소식들을 마치 지식인 양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 일상의 흐름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정보보다 타인들의 주장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고 있었다. 왜곡된 정보의 시대. 어딜 가나 오감을 막지 않으면 접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정보는 삶에 혼란을 준다. 그들은 나 스스로 내게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기가 힘들 만큼, 모두가 자기가 옳고,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고 유혹하고 있었다. 더욱이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매체가 생기면서 정보의 가면을 쓴 광고의 공격은 훨씬 더 심해졌다. 그야말로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알게 모르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스팸의 공격에 세뇌당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생활을 뒤로하고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도시 생활과 완전히 다른 조용함과 무료함에 일부 약장사들이 말하는 명현반응이 왔었다. 시골 생활의 특성상 몸은 바쁘고 힘이 들었지만, 정보의 단절로 인한 뭔가 할 일을 안 한 듯 머리가 허전하고 가슴이 답답했었다. 시끌시끌한 세상이 그리워지고, 심지어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면 기침이 나는 공기까지, 매일 저녁 술 한잔하며 빨리 떠나야지 했던 도시에서의 모든 생활이 그리워지기까지 했었다. 담배나 술을 끊은 듯, 뭔가가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했던 생활을 몇 년 하고 나니 이제 정신과 몸에서 도시의 독소가 많이 빠져나갔는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욕심이 없어지고 지금껏 목표를 잃고 하루하루를 방황하듯 살아왔던 행적들이 보였다. 더군다나 삶 자체마저 내가 살아가고자 했던 삶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이 시골의 한갓지고 조용한 생활이 익숙해졌다. 가끔 가는 서울 길에서는 갈 때의 들뜬 마음이 금방 시들어지고 빨리 서울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조금만 떠나도 맑고 자유로운 공기가 그립다. 이젠 도시의 유해한 환경과 억압받는 도시의 생활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다. 이렇게 산골의 오지 생활에 적응이 되고 있었다.     



한때는 신문을 펼치며 한잔의 커피와 담배를 입에 물고 하루를 시작했었다. 특히 아침에 신문을 보지 않으면 하루가 어색했던 그런 시절이 지나고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신문은 볼 시간도 볼 필요도 없어지며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신문지면을 통해 얻었던 전체적인 뉴스나 정보에 대한 것들은 아침 먹으면서 TV로, 출근하면서 차의 라디오로, 비즈니스 관련된 정보는 업무 시작 전 컴퓨터로, 그리고 현안에 관한 것들은 또 지인들의 전화나 메일로, 게다가 정치나 사회 문화 관련 정보는 저녁에 소주 한잔하며 소식뿐 아니라 논평까지 다 듣거나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보를 접할 기회가 너무 많아 신문을 펼쳐 본다는 게 시간 낭비였다. 그렇게 무용지물이 된 신문은 보지도 않은 채로 쓰레기로 차곡차곡 쌓아 문 앞에 내다 놓는 수고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그만 보려 하면 매번 집이나 사무실로 선물을 들고 와서 영업하던 영업소장의 눈물 어린 호소에 어릴 때 신문 배달의 추억을 떠올리며 재계약을 했다.      



신문 배달의 추억은 나에겐 아버지와의 추억이었다. 의지가 약하고 여리기만 했던 아들이 안타까우셨던 아버지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교육하셨다. 그중 하나가 새벽 신문 배달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소원이었던 자전거를 사 주신다며 신문 배달을 조건으로 걸었다. 6개월만 해 보라는 이야기에 나는 그 조건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생각을 않고 마냥 신이 났었다. 새벽 3시까지 배급소에 가서 신문 사이에 전단을 넣고, 자전거 뒤에 싣고 집집이 다니며 던져 넣는 일은 어린 나에게 정말 힘이 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남에게 월급을 받았다. 그리고 아침 등산객들의 요구로 신문을 파는 재미에 여분의 신문을 다 팔고 나면 돌려야 할 신문을 팔아먹는 횡령을 가끔 저질러 야단을 맞기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야 하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나가서 신문을 돌려야 했던 그 일은 결국은 중3이 되어서야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신문 돌리는 일을 통해 나는 세상의 한 단면을 배우고, 또 책임감도 배웠다. 내 어린 시절의 신문 돌리기는 이 세상을 빨리 이해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런 추억 속의 신문은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TV나 라디오, 인터넷 등에 밀려 정보지의 기능을 상실하며 구시대의 ‘유물’화 되고 있었다. 그랬던 신문이 여기 농촌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힘든 읍내 소식이나, 이 지방의 일기예보 그리고 군청, 기술센터 등의 여러 정보가 생활과 농사에 도움이 되며 그런 것들이 지역 신문에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는 이 지방 소식지가 아니면 알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중요한 사실은 몇 년 전부터 아내가 신문지를 아쉬워하기 시작했다. 여기 시골 생활에서의 신문은 정보지의 역할도 있지만, 종이로서도 꽤 유용하게 쓸모가 있었다. 장마철에 옷장이나 신발장 등 여기저기 습기 찬 곳에 놔두는 용도, 그리고 손톱 발톱 깎을 때 등 일상생활에서도 신문지는 꽤 유용하게 쓰인다. 또 가을에 배추나 무, 양배추 등을 수확해서 겨우내 먹으려고 저장고에 저장할 때 쓰기도 한다.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아내는 하나하나 정성 들여 싸서 저장해 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운 겨울에 삼겹살을 집안에서 구워 먹을 때 신문지는 중요하다. 튀는 기름 때문에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야 나중에 뒤처리가 쉽다. 바닥에 신문을 깔면 아들놈은 “아빠, 오늘 삼겹살이야?” 하며 신나 한다. 그래서 나도 아내에게 삼겹살 먹자는 소리를 “오늘 신문지 깔지.” 한다. 그렇게 신문의 용도가 지역 정보, 농사 정보 등 정보 전달의 역할과 신문지의 용도로 다양하게 필요하지만, 택배도 잘 오지 않는 지역이라 매일신문이 온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 했었다. 그래서 신문지를 모아 달라고 지인들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또 가끔 읍에 나갈 때는 관공서에 들러 모아둔 신문을 뭉텅 집어오곤 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신문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휴일을 제외하고 강원도민일보 정선 판 신문이 우편으로 오기 시작했다. 내가 신문 배달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 ‘정선군 남면 OOO길 OOO 반장 남상욱 님’으로 신문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초 이장이 반장 명단에 상욱이 이름을 넣어 면사무소에 올렸다며 면사무소에서 확인 전화가 왔었다. 담당 주사는 아이의 주소와 인적사항을 굳이 다시 물어보았다. 그쪽에서야 23살의 발달장애가 있는 청년이 동네 반장이라니 신기하기도 해서 확인하기 위해서였겠다. 사실 월급도 없는 동네 반장은 귀찮기만 해서 모두 사양하거나 봉사 차원에서 하는 일이었지만, 나에겐 내 아이의 첫 직업이자 사회진출이다. 내 아이의 사회참여는 이 사회에 내 아이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중요한 일이다. ‘장애’라는 주홍글씨만 아니면 존재가치를 증명할 이유가 없었지만, 굳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만 했던 까닭은 나는 ‘내 아이도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장애란 불편하기는 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반장일은 내 아이의 사회참여에 대한 실행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마치 입사 면접을 하듯 떨렸다. 그런데 그때 주소를 물어본 것이 신문을 보내주기 위해서였나 보다. 이후부터 상욱이는 개가 짖기만 하면 나가서 우체부 아저씨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신문을 받아온다. 그리고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거 왔어요.” 한다. “뭔데?” 하면 “내 신문, 반장 상욱이님 신문~~” 한다. 그 의기양양함이란 마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장군 같다.     



이제 이 세상 속에서 다운 증후군 상욱이의 존재감이 지역 사회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다. ‘장애’라는 주홍글씨로 이 사회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던 내 아이에게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하는 일은 하찮더라도 행정망의 말초신경 일을 맡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시스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 증명으로 정선군에서 ‘상욱이 반장님’ 앞으로 신문을 보내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선 내가 조금 과장된 의미부여를 시키고는 있긴 하지만, 그만큼 나를 흥분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아이는 아빠의 뒤를 이어 마을신문을 배달도 한다. 이제 나에게 신문의 용도가 더 많아졌다. 참여로 인한 자부심, 또는 자존감 고취로 인한 상욱이의 자랑거리는 나에게 있어 신문의 중요 기능 ‘용도 추가’인 것이다.     



“오늘은 정선에 무슨 일이 있나~ 함 봐야지.” 하며 상욱이가 소파에 앉아 짧은 다리를 꼬는 자세로 신문을 펼쳐 든다. 목소리에 자신감과 거드름이 넘쳐흐른다. 아이 엄마와 나는 웃는 눈길로 쳐다보며 “상욱아, 좀 자세히 보고 어떤 일이 생겼는지 얘기해줘.” 한다. 바람 소리 연주에 풀벌레와 매미의 합창이 들리고 있다.               




2016년 

작가의 이전글 미국의 작은 마을 바(Ba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