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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욱애비 Dec 25. 2020

K형에게

 


K형의 이번 소모임에서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에 저는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원래 저는 공부를 즐겨한 사람도 아니고 저한테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만 할 수 없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나는 학문도 실용적인 학문을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별 필요 없는 지식을 주입식으로 교육받느라 황금 같은 어린 시절을 많이 낭비하고 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억지로 주입되거나, 지식을 위한 지식(과시하기 위한 지식)은 사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에 관한 공부는 나의 가장 절실한 부분인 내 자식의 미래를 구상하다가 접하게 된 공부로 체계적인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라 현실적인 접근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감안하시고 두서없지만 제가 생각하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공동체, 공동체, 하니까 마치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 말이 회자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공동체를 만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발달은 직립보행부터 또는 불의 발견부터라고 이야기들 하는데 저는 공동체 생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해 저절로 생겨난 공동체는 같이 있으면 서로 보호할 수 있고, 서로 도와 사냥이나 농사를 할 수 있고 등등의 가장 단순하고 삶의 필수적인 조건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이 발달하여 오늘날의 사회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발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K형도 알다시피 교환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화폐가 발명되었고 그 화폐로 인해 빈부가 생겨났습니다. 화폐가 교환의 기능 이외에 축적의 기능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폐의 발명이 자본주의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중에서 욕심은 인간 발전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욕심이 모든 역기능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잘 쓰면 발전의 동기가 되고 잘 못 쓰면 큰 재앙을 낳습니다. 현재 ‘헬조선’ 이니 ‘흙수저’라는 말들이 유행처럼 나돕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욕심이 자본주의와 더해져 만들어 놓은 사회 현상의 결과인 것입니다.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란 말은 곧 인간관계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 시작은 어떤 큰 업적이나 공헌보다 먼저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공동체 공부를 하면서 학문적인 것보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모든 걸 생각하고 대비해봤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배제할 수는 없고 그 바탕에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공동체 정신을 붕괴시켰고, 그로 인하여 현실은 무섭도록 각박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그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 방식의 공동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원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게 된 것은 생존을 위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지구 상의 모든 동물에 우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속도가 붙은 인간의 발전은 건설적인 방향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소모적인 향락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향락은 마약과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지금처럼 향락의 종류가 많은 시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향락을 즐기기 위해선 돈과 힘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은 지금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 경쟁주의로 포장된 정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권력을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 같은 아류가 본류인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없애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이 만들어진 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물질문명의 발달, 자유민주주의의 발달, 의학과 과학이 발달 등에 의하여 우생학적 가치판단이 크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종의 기원』의 저자이자 진화론자인 다윈과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콜턴이 창시한 ‘우생학’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서 인간은 더욱더 우열로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K형, 저희 농원에서는 유기농 토마토를 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토마토를 저희는 6~7단까지 따는데 그건 줄기가 바로 서 있을 경우입니다. 토마토를 재배하다 보면 중간의 메인 줄기와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가지 사이에 자라는 줄기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아지라 부릅니다. 이 아지를 잘라 줘야 토마토가 바로 자랍니다. 그런데 이 아지는 가지나 줄기보다 더 튼튼하고 빨리 자라 어떨 때는 본줄기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줄기를 아지로 착각하고 잘라버리는 경우 그 나무는 비틀리고 수확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우생학’이라는 학문이 본줄기를 잘 못 잘라 아지로 커버린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과학의 가장 중심에 ‘생명공학‘이 있습니다.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여러 동식물을 유전자를 교란 및 결합해 먹거리를 풍부히 만들어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목적을 가지고 날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고 그 진실은 물질과 권력을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인 돈이 우상화된 세상의 시스템인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농사를 하다 보면 종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종자를 농사꾼이 자가 채종 하면 수확이 확 떨어지거나 아예 싹이 안 나오기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국적 종자회사의 연구소에서 씨를 생산하지 못하게 유전자 조작을 해서 판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계속 종자를 팔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명공학의 배경에는 ’ 우생학’이라는 학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국의 ‘종의 기원’의 저자 다윈의 사촌인 ‘콜턴’이라 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어 산업화와 물질 만능 정서의 발달과 맞물려 미국에서 급속도로 대중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우생학에 매료되어 세뇌된 신 귀족 주의자와 가진 자들은 인간의 우열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주관적인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제거해 나갑니다. 그 방법들은 기상천외합니다. 미국이나 기타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대부분 ‘단종법’을 시행했으며 격리 수용했으며 광기에 찬 히틀러는 인종청소란 이유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홀로코스트)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정책과 학살을 자행하며 기능이 떨어지거나 부족하다는 이유 또는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제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본의 731부대의 생체실험인 마루타(이 마루타라는 뜻은 통나무랍니다. 사람을 일본인이 아니라고 통나무처럼 아무렇게나 실험에 쓴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랍니다) 또한 이 우생학의 영향을 받아 저지른 수많은 살육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우생학이 판을 치는 이유는 사람을 ‘기능’과 ‘능력’으로 보기 때문이고 ‘능력 최우선주의’ 때문인 것입니다. 그 최종의 목적에는 돈과 권력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보다 나은 행복의 추구’ 일 것입니다. ‘우생학’이나 ‘진화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주의의 한 단면인 ‘자유경쟁 시스템과 개인주의, 물질 만능주의’ 등과 만나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격변하던 시기에 시대의 격랑 속에서 몸부림치던 한 가정의 둘째로 태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을 겪었습니다. 둘째라는 이유로 먹음직스러운 닭다리를 구경만 했고, 오빠라는 이유로 참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처음엔 억울했던 것을 표현하면 속이 좁다고 야단맞았습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로 성장하다가 독립을 했고 나중엔 나 스스로 그런 게 당연한 것처럼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장애가 있는 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 아마 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차별과 억울함을 거의 다 겪었습니다. 이후 내 아이로 인해 이 사회의 모순을 알게 되었고 이 불평등의 원인이 아주 다양한 듯 보이지만 그 근본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라는 무한경쟁으로 자기만의 욕심을 채워야 하는 이 사회의 잘못된 정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아이가 타고난 장애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조금 불편하다고 다른 별종으로 분류가 되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대책은 ‘보호’라는 명분 아래 ‘격리 수용’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비장애인이 늙어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경험과 경륜이라는 지적 자산을 가지고 있어도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면 또 ‘보호’라는 명분으로 ‘실버’라는 말이 붙은 다양한 고려장으로 보내버리거나, 들어가는 게 아주 당연한 코스입니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에 늙으면 가족들 자식들에 둘러싸여 생을 보냈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후대책으로 연금이나 들어 놓고 실버타운에 들어가 살다가 죽을 때나 자식과 손자를 보거나 그도 못 보고 귀천들 하십니다. 가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가 깨짐으로 생긴 사회 현상입니다. 처음은 나도 그냥 그런 거려니 했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나도 그냥 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도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면 안 될까? 하는 아비의 생각에서 그런 세상을 상상해봤습니다. 오랜 기간 외국과 지방을 찾아보고 설마 내가 하는 고민을 나만 하는 게 아니겠지 하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과 그 고민을 바탕으로 실천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만나도 봤습니다.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내 아이들도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를 힘들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우생학과 자본주의, 자유경쟁의 명분에 세뇌당해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K형, 내가 생각한 세상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그냥 있었습니다. 우리가 ‘대가족 제’ 일 때 물질이 조금 부족하고 일 못 한다고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기는 했지만, 같이 부대끼고 시시덕거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바보 소리를 들어도 따뜻한 정이 깔려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격리 수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대가족 제’가 깨지며 ‘핵가족화’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시대에 맞춰 좀 더 결속력 있고 책임감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민주주의, 자유경쟁의 화장을 한 현대의 신귀족주의와 차등 시스템의 병을 공동체 정신으로 치유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사회는 하늘의 법인 ‘양심’이 무너지고 인간의 법에 따라 유지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이 인간의 법은 만인 이 공평한 법이 아니라 가진 자의 칼 같은 법입니다. 왜 사회를 다스리는데 그런 법이 필요할까요? 공동체 정신(함께 하는 정신)이 무너지고 가족공동체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잘 따져보면 가족공동체는 역할분담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경험과 경륜 역할의 할아버지와 물리적 능력 담당인 아버지 미래 담당인 자식 그리고 교육과 가족의 건강 담당인 어머니 등으로 말입니다. 이 가족공동체가 복원되어야 하고 그런 가족공동체를 기반으로 마을공동체가 복원되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차츰 확산되다 보면 지구 공동체, 생태 공동체 복지공동체 등이 모두 복구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도의 북부 히말라야의 산자락에 작은 티베트로 불리고 있는 ‘라다크’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의 크기는 산 위의 눈과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물의 양에 따라 변하는 작은 마을로, 평화로운 과학화되지 않은 농경사회 부족입니다. 이들은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생활과 협동, 깊은 생태적 지혜를 통해 천년을 넘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유지해 살아왔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공동체 삶 속에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아이들과 여성들 그리고 노인들이 존중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웠던 라다크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문화가 밀려들어 오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물질문명의 유혹에 빠진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부끄러워하고 열등감을 느끼면서, 서구문화를 무차별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과거 최고의 직업이었던 라마승마저 기술을 배워 기술자로 직업을 바꿉니다. 그들의 삶의 기본이었던 공동체는 그냥 조용히 너무 쉽게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니라 ‘나’만이 주체가 되기 시작하면서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공동체의 아름다운 질서가 물질과 경쟁의 유혹에 붕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라다크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공동체적 도덕과 양심이 없는 무책임한 물질주의는 사람들을 개인주의로 만들어 버리고 또 욕심의 덫에 빠져 스스로 ‘삶의 질서’와 ‘함께 살아가는 이유’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이걸 되돌려보자는 것입니다.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당연히 공동체 정신을 보다 공고히 해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로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쉽지 않은 일인 건 압니다. 하나 조금의 어려움에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미래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보니 어떤 일이든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러니 실패가 두려워서 시도하지 못한다면 그 일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위대한 일들은 모두 부정적인 반대 속에서 결행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깊은 밤 아이 문제로 잠 못 이룰 형을 생각하며….               

2015년 쓰고 2020년 12월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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