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by 상욱애비


소통하고 생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혼자만의 자위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삶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을 담아 보고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삶을 끌어주는 선배가 한없이 절실했던 과거의 기억에 후배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낯선 홀랜드에 떨어졌을 때 조금은 덜 외롭게 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귀농하면서 '상욱애비'라고 스스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부모가 지어준 호적상의 이름은 행정적으로는 그대로 쓰겠지만, 지금부터는 내 삶의 대표성을 아이 상욱이의 진정한 아버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습니다.



귀농 전, 나는 농사는 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고,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하직원에게 “너는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라.”라고 떠들던 무지한 도시 놈이었습니다. 그 도시 놈이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 시골에 와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겁도 없이 유기농을 하면서 그냥 땅에다 씨만 뿌리면 되는 줄 알았던 농사가 삶의 가장 기본이고 가장 높은 학문이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귀농한 지 10여 년이 넘었는데 아직 '초보 농부'라 칭하는 이유는 농업이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농 자지 천하 대본(農者之 天下 大本)'을 조금씩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 평생을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글도 모르면서 흥얼거리며 시를 읊었고(4~5살 때니 어디서 들은 것을 말했겠죠.) 땅바닥에는 돌로 바닥에다, 종이를 주면 종이에다, 종이가 없으면 벽에다 사정없이 그림(낙서 수준)을 그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야단을 맞으면 혼자서 자기감정에 빠져 노래를 아주 슬프게 흥얼거리며 온종일 훌쩍거렸습니다. (아마 ‘진주 조개잡이’란 노래였을 겁니다. 그 뒤로는 레퍼토리가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렇게 슬펐던지…….)



글은 두 살 위인 형이 읽어주는 만화를 옆에서 보면서 배웠습니다. 시끄럽다고 만화방 주인이 눈치를 줘도 모르는 척하다가 쫓겨나기도 하면서, 형은 동생을 집에 두고 혼자 만화 보러 가지는 못했나 봅니다. 주인에게 혼이 나서는 얼굴이 벌게진 형을 보고 미안해서 옆에서 훌쩍대다가 화난 형한테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책은 나의 취미가 되었고 그림은 나의 직업일 뻔했고, 노래는 나의 위안이었습니다.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 기억나는 초등학교 때 에피소드 하나는 옆 짝지가 학교에 가져온 동화책이 부러워 당시 실직 중이던 아버지께, 책을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시던 아버지께서는 말없이 그냥 휙 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 술을 한잔 얼큰하게 드시고는 양손에 책 묶음을 들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옜다, 이놈아 실컷 봐라.” 책의 종류는 다양했고 먼지 냄새가 풀풀 나긴 했지만, 그처럼 기뻤던 날은 흔치 않은 어린 날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투정 어린 책망에 아버지는 헌책방에서 묶음으로 샀으니 돈이 별로 안 들었다고 해서 더 즐거운 날로 기억이 됩니다. 그 묶음 속에는 그때는 잘 이해 못 했지만, 테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지, 부활 등의 명작들도 있었고 단칸방에서 밤새 불을 켜고 그 책들을 읽어 어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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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시골의 할머니 집에 갔을 땐데, 해가 나와 있는데 비가 내렸던 모양입니다. 천재 예술가(?)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던 나는


해님은 방긋방긋

비 님은 오시고

앞산의 호랑이 장가가는 날


해님은 방긋방긋

비 님이 내리는데

뒷산의 여우님 시집가는 날


이라고 즉흥시를 멋지게 읊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어머니께서 가끔 말씀하셨습니다. 4살 때랍니다. 이건 제 기억이 아니라 어머니께 저에게 말씀해준 기억을 제가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격변하던 시대의 배경에 우리 집은 서울, 부산 등으로 이사 다녔고, 전학을 다니며 서울내기라는 이유로,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도 왕따를 당하기도 했었습니다. 피 끓던 시절에 방황도 잠깐 했지만 결국 제자리 찾아가듯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고,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야 그림을 마음 편안하게 그리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배웠습니다. 그때부터 불편한 건 참지를 못했나 봅니다. 젊은 혈기에 붓을 잠깐 놓기로 한 것이 아직도 붓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는 굶어 죽는다는 처가의 잘못된 편견에 반쪽의 축하만 받으며 어렵게 결혼을 했고 내 가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오기가 생기기도 했고, 또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게 목적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게 되면 전 세계를 떠돌며 그림을 그리며 살자고 아내와 약속도 했었습니다. 나에겐 절실했던 꿈인데 그 이야기를 하면 남들은 철이 없어도 한참 없었다고 하네요.


돈을 버는 재미에 빠져 사업에만 혈안이 되었던 나에게 ‘수단’으로써의 돈이 어느 사이에 ‘목적’이 되어버렸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효도도 하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돈의 위력과 유혹에 빠져서 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 벌어서 어떻게 할 건지 생각도 없이 그냥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아귀처럼 벌려고만 했습니다. 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이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비리를 정당화하며 그 속에서 있었습니다. 결국, 돈을 벌기는 조금 벌었고 나도 모르게 돈에 중독되어 갑질도 많이 했습니다. 그게 돈을 번 자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살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겉은 화려하고 속은 썩어있는 내 인생의 암흑기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의 문제(내 아이는 다운 증후군으로 태어났습니다.)를 나는 비겁하게 풀려고 했습니다. 내가 돌보는 것보다 전문가들이 돌봐 주는 게 좋을 거라는 명분을 가지고 핑계를 대며 복지가 좋은 외국으로 이민을 계획했습니다. 내 아이를 안전하다고 생각이 되는 어딘가에 맡기고 내 짐을 덜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민 절차 중 아내가 두 번째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큰 수술을 세 번 했습니다. 갑상샘암, 유방암, 자궁적출 수술 등 모두 전신마취를 해서 하는 수술이라 아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가슴을 쥐어짜는 수술이었습니다. 그중 두 번째인 유방암이 이민을 위한 수속 중에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민을 포기하게 되었고, 내 가족의 문제를 나의 미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당당하게 정공법으로 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 사회의 모순과 편견에 한 번 붙어 보기로 한 것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겠지만 맞짱을 떠야 결론이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한 부대쯤 이기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또 오기가 발동했나 봅니다. 제가 어릴 때 동네에서 싸움은 좀 했습니다. 하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겁니다. 아니 사실은 알아도 모르는 척한 겁니다.


그 교두보를 청정지역인 정선에서 시작하려고 귀농한 겁니다. 저는 ‘캠프아라리’란 자립형 복지 공동체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시작으로 ‘정선 자연 햇살 농원’이라는 농원을 만들었습니다. 복지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수익원을 유기농 회원 직거래 형식으로 풀고, 좋은 먹거리보다 착한 먹거리(저는 영양이 많은 먹거리보다 독성이 적은 먹거리를 착한 먹거리라 부릅니다.)를 우리 농원의 경쟁력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저의 화두는 복지와 착한 먹거리 이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사실 복지문제는 모두의 문제인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이제 ‘우리’가 없어지고 ‘나’만 존재를 하나 봅니다. 학교에서도 오로지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어떻게든 일등만 하면 사람들의 존중을 받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방송의 예능프로에서까지 ‘나만 아니면 돼!’를 소리 지릅니다. 벌칙의 대상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말입니다.



예전의 도시 생활을 할 때는 그냥 무심히 웃고 지나가는 일들이 이제는 예민하게 제게 다가오곤 합니다. 물질적인 편안함보다는 정신적인 충족이 복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며, 저는 복지문제란 힘의 논리와 동정의 논리로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소통과 사랑으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물질적인 독립이 필수고 그래서 ‘자립형 복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원은 꽤 운영이 잘 되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직거래 고정고객이 많이 늘었고 또 그 소문을 듣고 방송국에서도 많이 찾아왔습니다. 다 거절했지만, 후배 가족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말에 EBS의 '희망풍경’과 KBS의 '사랑의 가족'만 촬영도 했습니다. 그때가 농원의 최절정기였습니다. 그런데 또 하늘이 말립니다. 저보고 방법이 틀렸다고 질책하는 건지, 아니면 초심을 잃었다고 벌을 주는 것인지 갑자기 사고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EBS의 '희망풍경’

https://blog.naver.com/wkdusguard/209068299

KBS의 '사랑의 가족'

https://blog.naver.com/wkdusguard/220693709673



아내가 삼재가 들었다고 했을 때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횡액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벌에 쏘여 쓰러져서 119에 실려 가는 것을 시작으로 회전근 파열로 어깨 수술을 하고, 3번 요추 압박골절로 꼼짝 못 하고 누워서 3개월을 보내고, 겨우 일어날 만할 때 이석증으로 또 쓰러지고를 3년 동안 반복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가던 길이 주춤거리며 꿈이 더 멀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정신이 조금 차려지면서 진지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핑계 대며 생각대로 되지 않았음을 하늘의 뜻으로 돌려봤습니다.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정말 내가 최선이었나 하는 자책론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음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몰려드는 횡액을 버티고 살아있다는 것은, 기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나이만큼 최선을 다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역발상으로 다시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당분간 농원을 닫고 강릉으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정선 농원에서도 가깝고, 큰 병원도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도 다듬고, 재활도 하고, 공부도 하고, 글도 쓰며 남은 시간에 기회를 살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돌이켜보면 내 아이의 문제와 아내의 병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고, 그 결과 이곳에서의 생활이 아내의 건강을 되찾게 해 주었습니다. 또 내 아이의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전체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나였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 동네 분들은 저 보고 성공했다고들 하십니다. 아내의 건강을 되찾은 것만 해도 큰 성공이라고들 말씀을 하시며 축하해 주십니다. 가끔 예전의 지인들을 만나면 무 종료론자인 저이지만 신이 길을 인도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참고로 저는 신은 모두의 신이지 종교인들만의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둔한 제 생각에는 아무리 좋은 사상과 이론이라도 사람들의 이해가 없거나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의 소통의 방법으로 글을 쓰고 책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2014년 에세이스트 자기소개 글

수정 2020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