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부산의 어머니를 뵈러 갔다. 어머니가 부산 해운대의 여동생 집으로 내려가신 뒤 일 년에 한두 번 가서 뵙는 정기 방문이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너무 좋았나 보다. ‘이게 얼마 만이고?’를 연발하시며 반가워하셨다. 자주 뵙지를 못하니 물어볼 말도 별로 없어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보는 아들에 대해 반가움에 말문이 막히셨는지 내 얼굴만 쳐다보시며 그냥 손을 꼭 붙잡고 같은 말만 반복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집보다 여동생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딸이 편해서라기보다 불쌍한 아들이 보기 싫다고 하셨다. 하지 못할 숙제를 하고 사는 아들이 너무 힘들어 보이고 불쌍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옆에 있어봤자 아무 도움을 못 주는 당신의 마음이 너무 아파, 눈에서라도 멀리 있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내 손을 연신 쓰다듬으시며
“이제 농사 좀 지을 줄 아나? 손이 많이 거칠어졌네, 로션도 좀 바르고 해라.”
하신다. 이제는 총기가 많이 사라진 흐릿하신 눈에 물기를 담으며 ‘힘들제….’를 연발하신다. 어머니를 만나면 항상 마음이 아릿하고 촉촉해진다. 이제 자식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야 하는 노쇠한 몸으로 아직도 보호해 주고 싶은 자식에 대한, 끝나지 않은 사랑에 대한 미련이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저민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내가 쓴 글을 읽어 봤다며 물어보셨다.
“그래, 니가 할라는 게 뭐라꼬?”
하시길래 자립형 복지 공동체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 드렸다.
“어머니, 상욱이 장애 문제로 고민해 봤는데 이건 단순히 장애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더라고. 편견과 갑질의 문제야. 이 세상에는 장애 말고도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리고 자기가 억울한 지조차도 모르고 살고 있어. 갑질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갑질 하는 줄도 모르고 있고. 그런데 그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의 문제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 볼까 하고 고민해 봤는데 그 답이 공동체의 회복이더라고. 우리는 모두가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데 그 바탕인 공동체 정신이 훼손되어 있는 거야. “
등등을 잠깐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표정에 아차 싶어 서둘러 이야기를 끝낸다. 오래 사시라고, 내가 공동체를 만들면 어머니도 모시고 와서 살 테니, 그때까지 꼭 사시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에그~ 철없는 것, 나이가 몇인데 아직 그러고 사나? “하시며 답답해하신다.
당신께서는 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만, 당신의 자식에게는 이제 제발 이루어지지 못할 일에 관한 미련 좀 버리고 편하게 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 말씀은 못 하고 늙은 얼굴에 걱정만 서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냥 물러난다. 이제 모든 것이 다 귀찮고 죽는 날만 기다리신다는 말씀만 연신 해 대는 어머니께 더 이상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어서였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야. 별 신경 쓰지 마. 우리 식구 모두 건강하게 잘살고 있고 어머니만 편안하면 돼.”
어머니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얼굴에 서린 걱정을 걷어내질 않는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여동생의 표정도 ‘우리 오빠 언제쯤이나 철이 들까?’ 하는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이다.
내게 친형이 하나 있다. 어려운 가정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성공한 사업가로 맨손으로 시작해서 50대 초반부터는 회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산다. 한때 한참을 흥분해서 보던 주말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형이다. 형은 어릴 때부터 돈을 벌어서 집안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대 가라는 아버지의 엄명도 거역하고 상대 경영학과를 진학할 정도로 자기 파악과 집념이 강했다. 형은 어린 시절 나에게 만화책을 읽어주며 한글을 가르쳤고, 중학교 때는 공부 못하는(자기와 비교해서) 동생이 창피하다고 개인과외도 해 주었다. 주변의 반대 속에서 하는 결혼에 후원자도 되어 주었다. 언제나 나의 멘토이자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였던 형이지만 이일만큼은 절대 반대다.
“네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거냐? 그냥 네 애나 잘 돌봐라. 그 나이 되도록 아직 세상을 모르니…. 쯧 철이 도대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라고 안타까워하다 못해 화까지 낸다.
이렇듯 내 가족 모두 나에게 철이 없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할 일을 구분도 못 하고, 아직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헛된 꿈만 꾸고 살고 있다고들 한다. 사실 ‘헛된’만 빼면 꿈을 꾸고 산다는 부분에 대해선 좀 그렇긴 하다. 나는 평소에 사람의 삶에는 항상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의 성격상 조금 상상이 가미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사실 아직도 철이 없다는 게 구체적으로 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궁금하다. 철이 든다는 게 어떤 건지, 내가 어떻게 변해야 철이 드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모두가 말하는 철이 든다는 게 가족보다 나 혼자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철이 드는 걸 고려해 봐야겠다. 우선의 편안과 향락을 최우선시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사는 것이 철이 드는 것이라면, 철이 드는 것을 사양하고 싶다. 해 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고 힘들고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꼭 해야 할 일도 하지도 않고 잘못된 것을 모른 척 묵인하며 사는 것이 철이 든 것이라면, 그 또한 거부하련다. 내 자식의 미래가 억울하고 억압된 삶을 살 게 분명한데도 운명에 책임을 떠넘겨 버리고 사는 게 철이 드는 것이라면, 그런 철은 아예 들지 않으련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늙어서 장애가 생기든 간에 주어진 조건에 맞춰서 같이 일하며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철이 없단다.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를 주고 모두가 존중받고 사는 마을을 만들자는 주장이 철이 없단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를 십시일반 해결해 보자는 게 철없는 이야기란다. 평생을 자식만 바라보고 사시던 늙으신 어머니도, 명문대 출신의 성공한 형도 손사래를 치며 반대를 한다. 어떤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보려고 하는지 구체적으로 듣기도 전에 반대부터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힘든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고 하지 말라 한다.
얼마 전에 만난 Y대 정치학과 교수인 친구 녀석도 왜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하려 하느냐고, 자기는 쌍수 들어 반대한단다. 이런 일은 개인이 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나하고 가깝고, 나를 아낄수록 그렇게들 반대를 해댄다. 그런데 정부가, 큰 단체가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곳에서는 그 누구도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럼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일을 생각하고 추진하다 보니까 이 세상에는 하자고, 하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하는 사람은 적었다. 전부 이 일에 대해서는 훈수만 한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나부터라도 한번 해 보려고 시작을 한 것이다.
모두가 반대하고, 내 아이들의 미래를 타협하라고 하고, 어차피 돌봐주고 살아야 할 아이들인데 자립이나 참여보다는 관리가 편한 쪽으로 방향을 고쳐 잡으라고 한다. 그동안 만났던 특수교사나 사회복지사들은 현실적인 대안으로 후원자들의 이해가 쉬운 그룹 홈 형식의 공동체를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 자금을 연결해 주겠다고도 한다. 쉬운 길을 택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길을 선택하면 목적이 바뀌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참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고급스러운 격리 보호로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 뜻을 조금 꺾어서 조금 다르게 시작해 놓고 나중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면 어떻겠냐고도 한다. 좀 타협하고 가자고 하는 소리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는데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을까? 길이 약간만 틀어져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인데. 초가집을 지으려고 기초하고 그 위에다 10층짜리 건물을 올릴 수 있을까?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정도를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고집이 세다고 하면서 남의 이야기도 귀담아들으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방향을 바꾸라고, 문제를 발견하고 그걸 고쳐보려 하는데 그걸 고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가? 목적이 같고 방법을 이야기할 때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조율해야 하는 거다. 모두 다 자기 이야기를 안 들으면 저 보고 꽉 막혔다고 한다.
이렇듯 이 일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지 나도 안다. 이 일은 돈을 모으고 건물을 만들고 교육을 하는 일이 관점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철이 없으련다. 철이 들어서 현실적으로 이것저것 계산해 보면 포기하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만리장성을 쌓아 나가다 보면 어느샌가 사람들이 모여 같이 쌓아 나가리라는 철없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 보련다.
여기 정선 집으로 내가 만들려고 하는 자립형 공동체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주로 오고 있다. 빨리 만들어 보자고, 그런 복지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너무 좋겠다고 말들 한다. 자신들도 동참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여러 가지 여건상 힘이 들고 여건이 성숙하는 대로 동참할 테니 예비 동참자 명단에 넣어 놓으라고들 한다. 이제 이 철없는 나에게 철이 없거나 반쯤 철이 나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새로 만드는 추진위원회에 참가시켜달라는 철없는 사람도 생기고 자신의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주겠다는 철없는 사회복지사들도 생기고 있다. 이 돈키호테같이 철없이 가는 길에 동참자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그들도 처음에는 돈키호테에게 보내는 생경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지금은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 속에서 조금의 희망도 느낄 수 있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Dream the impossible,)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Fight with unwinnable enemy,)
얻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Do the impossible love,)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Resist the unresistable pain,)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을 잡아라! (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소설 속의 돈키호테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로시난테에 내 아이를 태우고 산초 판자가 되어 철없는 여행을 떠나 보련다. 그러다가 어느새 한 떼의 돈키호테들이 무리 지어 가는 것을 희망하며 살아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