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그곳,
이중섭 미술관에 다녀왔다.
가보고 싶었던 만큼 사전에 더 꼼꼼히 챙겼으면 좋았으련만. 인터넷으로 시간별 사전 예약자 50명만이 입장할 수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서귀포까지 와서 예약 못했다고 맥없이 포기할 순 없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미술관에 도착한 후 현장 대기 명단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꼭 관람하게 해 주세요. 하는 마음의 소원을 담아.
어제 제주의 날씨는 도깨비 출몰, 호랑이 장가, 여우 시집이 한 날에 성사되었음을 공표하는 것 같았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데 눈발은 날리고, 바람은 부는데 햇살 부서지는 하늘은 더할 수 없이 맑았다.
그 맑고 쨍한 햇살이 사진에도 담겨 이중섭 선생의 제주 거주지 앞에서도 환히 빛났다. 그분이 가족과의 한 때를 보내던 이곳은 서귀포 앞바다의 푸른 바다와 따스한 제주의 햇살이 감싸주는 곳이었다.
제주의 날씨는 아마 그 시절에도 이랬을 거다. 눈부시다가 흐리다가 눈이 오다가 바람이 불다가.
전쟁의 풍화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가난과 삶의 좌절들을 안고 살아간 곳. 고작 1평 조금 넘는 이 공간에서 네 식구가 살을 부댄 시간들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억으로 남았다.
이중섭 미술관 현장 대기 예약은 효험이 있었다. 물론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드디어 입장이 가능하다는 전화를 받았고. 그렇게 고대하던 이중섭 선생님의 특별전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특별전 '서귀포 귀향', ~2022.3.6까지 / 인터넷 예약, 현장 대기 예약 가능)
서귀포의 섶섬을 바라보며 그린 유화까지 관람할 수 있는 특별 전시는 삼성가의 사회 환원으로 가능한 전시였다. 때문에 기존의 관람료도 내지 않고 모두 무료로 관람이 가능했다.
미술이라곤 피카소 정도나 알고 있는 교양이지만, 그래도 이중섭 선생님의 그림은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마다 글씨체가 다르듯 화가의 독특한 그림체와 세계관 등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 분의 그림을 보면 하나로 이어진 듯하면서도 매 작품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는 아이들, 물고기, 게의 모티브는 아마도 서귀포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
아내와 아이들이 외가가 있는 일본으로 간 후의 서신에는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 어떤 부귀영화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가족이면 되었을 그의 마음이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의 비극적인 삶이 그려져 슬프고도 애달프다.
이중섭 미술관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본 섶섬. 그가 바라보았을 저 풍경과 그의 그림을 겹쳐보았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엄혹함을 살아내면서도 가족과 아이들을 사랑했던 이중섭 화가. 그의 그림에 감동이 있는 건 그가 살아낸 삶이 그림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천재들은 왜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는지.
고작 마흔한 살에 유명을 달리한 그를 생각해본다. 마흔한 살. 고작 마흔 한 살이라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건 그가 사랑했던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여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그의 그림이 얼마나 천재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는 것.
늦었지만 세상도 그를 알아봤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름과 작품은 세상에 남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것.
그의 그림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단 생각을 했다.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고,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차고도 벅찬 인생이 아닐까. 이 소박한 일상이 누군가에는 평생의 이루지 못한 소원이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