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씽크 2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주 Apr 25. 2019

재난방송에 나중은 없다.

 지난 4일 오후 7시 17분, 강원도 미시령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산불은 건조경보와 강풍이라는 기후조건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당시 강원도 고성뿐 아니라 강릉, 인제에서도 산불이 일었고 고성, 속초, 강릉, 동해, 인제까지 총 5곳에 국가 재난 사태가 선포됐다. 갑작스레 번진 불길과 긴급한 진화작업 가운데 주민들은 대피해야 했다. 

 4일 밤 당시 나는 SNS를 통해 산불 발생 소식을 접하게 됐고, 실시간 상황을 보고자 자연스레 TV를 틀었다. 당시 산불 피해 현장에 있던 분들도 정확하고 신속한 상황 파악을 위해 많이들 TV를 켰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산불이 발생한 지 몇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지상파 방송 3사에서는 산불 관련 재난방송을 접할 수 없었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7759     


방송법 제75조(재난방송)
방송사업자는 재해 또는 재난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재난방송을 하여야 하며...     

 이렇듯 방송사는 재난이 발생했거나 발생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재난방송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지상파 방송은 공공성을 띠고 있다. 즉, 시청자들에게 재난 상황을 전달하고 방재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좀 더 무거운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MBC는 과연 강원도 산불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산불이 발생한 4일부터 5일까지의 시간을 따라 당시 방영된 재난방송을 살펴보자.
     

#오후 11시 7분

 MBC가 ‘고성 산불 속초 확산’에 대한 뉴스특보를 시작한 건 오후 11시 7분. 드라마 <더 뱅커> 방영을 마친 후, <킬빌>을 결방하고 특보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MBC는 지상파 방송사 중 가장 빠르게 특보 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빠르게’ 보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특보가 시작된 11시 7분은 산불이 발생한 지 4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산불 재난 국가 위기 경보' 최고 단계 발령과 소방차 총동원령도 약 1시간 전에 내려졌다. 빠르게 번져나가는 산불에도 방송은 느렸다.

 물론 MBC 등 지상파 방송사만 재난에 뒤늦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다. 재난 발생 시 각 방송사에 재난방송을 명령할 수 있는 방송통신위원회는 많은 방송사에서 산불 관련 뉴스특보를 방영한 지 한참이 지난 후인 5일 새벽 1시 10분에야 카톡으로 무의미한 재난방송명령을 내렸다. 산불을 최우선으로 다뤄야 했던 재난주관방송사 KBS도 약 8분의 짧은 강원도 산불 보도 후 정규편성인 ‘오늘 밤 김제동’을 내보내는 안일한 태도를 보였으며 산불 발생 후 4시간 이상이 지난 뒤에야 특보 체제로 전환했다. 수신료의 가치도 주관방송사라는 이름도 소용없는 모습이었다. 이렇듯 정부부터 각 방송사까지 재난 대응 체계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상황에서 재난방송을 위해 각 방송사만 고군분투하는 건 쉽지 않고 비효율적이다. 정부와 지상파 방송, 그리고 유료방송까지 단일 체계 안에서 정보 공유와 협동을 이뤄낸다면 시청자들이 다양한 채널에서 어렵지 않게 신속한 재난방송을 만나볼 수 있는 날이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한편 재난방송은 빠르고도 정확하게 필요한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방송의 내용이 현장의 상황 판단, 대피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SNS 등 온라인에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수많은 정보가 떠돌고 재난 현장은 빠르게 변한다. 즉 재난 상황에선 신뢰성 있는 정보처가 절실하며, 방송은 그 역할을 해내야 한다. 무엇이 정확하고 필요한 정보인지 가려내야 한다. 그렇다면 재난방송에서 무엇이 필요한 정보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재난방송이 보도의 기능과 함께 방재의 기능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된다. 즉 정보가 재난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따지면 된다. 이번 산불의 경우, 강원도 화재 현장에 있는 시청자들을 위한 대피 방법, 행동 요령 등이 우선적으로 방송됐어야 한다. 그러나 MBC 뉴스특보는 방재에는 소홀한 채 보도에만 치우친 모습을 보였다. 특보의 대부분은 시청자 제보로 이루어졌다. 제보는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한다는 장점은 분명 하나 재난방송의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부적절한 방법이다. 당시는 긴급하게 대피 안내를 하고 피해를 줄이는 데 열중해야 할 때였다. 현장에 있는 시청자들이 필요한 내용은 같은 현장에 있는 시민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보다 지금 어디로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지,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보도로만 가득 찬 뉴스특보는 피해 지역 외 사람들의 궁금증은 충족시켜줄지 몰라도, 정보가 가장 절실한 재난 현장에선 도움이 되기 어렵다.

 또한 검증되지 않은 시민들의 제보가 주를 이루다 보니 부정확한 정보가 전달되기도 했다. MBC는 가스충전소 폭발을 인용 보도했으나 이는 오보로 판명됐다.

 가스충전소 폭발 소식에 온라인에서는 뉴스 캡처본과 함께 걱정 섞인 글들이 올라왔고 오보임이 밝혀진 후에도 사실 여부가 혼란스럽게 오가기도 했다. 불안정한 재난 상황에 이러한 오보는 치명적이다. 방송은 혼란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정보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상파 뉴스특보마저 오보를 내보낸다면 시청자들은 뉴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불안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MBC 뉴스특보는 제보만 의존하지 말고 영향력에 걸맞은 신중한 보도를 해야 했다.    


#다음날 12시

 비장애인에게도 이번 재난방송이 늑장 보도로 여겨졌으나, 청각장애인의 경우 다음날이 되어서야 방송을 통한 산불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 현재 MBC는 모든 방송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나 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의 경우 자막만으로 방송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실시간 수화 방송은 청각장애인이 재난 상황을 파악하는데 거의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그러나 편성표에 따르면 MBC는 수화 방송을 정오 즈음이 되어서야 시작했다. 이미 산불 진화작업이 많이 이루어졌고 대피는 끝난 이후였다. 장애인에게 재난방송의 신속함도, 방재 기능도 제공되지 않았다. 한편 산불 당시 외국어 방송 또한 제공되지 않아 외국인도 재난방송에서 소외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화재 현장에 있었을 것이고 그들 또한 재난방송의 시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방송사는 공익성이라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방송사 측은 갑작스러운 재난방송 시 수어 통역과 다국어 자막 제공 등 소수자를 위한 방송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최선은 재난 발생 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심한 서비스 제공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지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기존의 서비스를 대신해 정보를 전달할 방법이라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재난 정보전달시스템이 꼭 언어일 필요는 없다. 만약 재난방송에서 품을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적은 언어 대신 직관적인 기호를 화면에 띄운다면 모두가 빠르게 정보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방송사와 정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로 소수자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지 말고 모든 국민을 위한 재난방송이 되기 위한 보도 방법을 세심하게 고민해야 한다.     

다양한 매체들이 존재하는 지금에도 지상파 뉴스는 여전히 넓고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 아마 남녀노소 가장 손쉽게 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지상파 방송의 파급력은 믿을 수 있는 신속한 정보가 절실해지는 재난 상황에 한층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그동안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은 재난 상황에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미흡한 재난방송→ 비판→ 매뉴얼 재정비’가 끊을 수 없는 순환처럼 반복됐다. 위에서 한 산불 보도에 대한 비판도 모두 이전 재난방송 이후 계속 지적되던 내용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비판에도 재난방송의 변화는 체감하기 어렵다. 

 이번 산불 보도 또한 재난방송 매뉴얼 수정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젠 매뉴얼 재정비에도 ‘미흡한 재난방송’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난 대처에 나중은 없듯 재난방송에도 나중은 없다. 방송이 끝난 후엔 재난의 피해를 줄일 수도, 시청자들을 안심시킬 수도 없다. 재난 발생 시 신속하게 방송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필요한 건 매뉴얼이다. 문서를 넘어 현장을 책임지는 매뉴얼이어야 한다. 재난방송은 누군가의 생과 사를 가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 체계적이고 세심한 보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젠 재난방송이 재난 속 모든 사람을 향하기를, 또다시 바로잡아야 하는 보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있고 싶고, 혼자이긴 싫고 _그럴 때 라디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