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먼저"의 실천
얼마 전에 유럽에 있는 한인단체로부터 강의를 부탁받았다. 점점 더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내가 망설이자 유럽의 장애인 복지가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설명을 하며 설득을 하는 바람에 결국 가기로 했었다. 덕분에 한국, 미국, 유럽 국가들의 항공사 서비스와 공항 이용을 비교를 할 기회가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있는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장애인 먼저(People First)”라는 슬로건 아래 여행을 돕고 있다.
유럽 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휠체어를 탄 공항직원이었다. 유니폼을 입고 일을 하는 모습이 멋있어 같이 사진도 찍었다. 체크인이 끝나자 공항직원인 듯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이 다가와 불편한 것이 없는지 친절하게 꼼꼼히 물었다. 필요 이상의 질문세례를 받으며 마치 시험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 좀 언짢은 감이 있었지만 “장애인 먼저”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진 넥타이를 보니 진짜 장애인을 배려하려는 유럽의 마음이 느껴졌다. 비행기 탑승 시에는 장애인이 먼저 타고, 내릴 때는 다른 승객이 다 내릴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안내를 받았고 승무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모두 다 두 명의 도우미 직원이 나와 질문을 하는 것이 비슷한 것을 보니 유럽연합의 결정인 듯하다. 그런데 그들도 나도 질문에 정신이 빠져서 무슨 서비스를 받았는지 기억조차도 나질 않는다. 비행기를 타러 갔을 때 요란했던 것에 비해 내렸을 때는 장애인 서비스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스스로 짐을 찾아 나온 것 같다.
미국에서는 미국 장애인 법 (Americans with Disability Act: ADA)이 통과된 1990년 초창기에는 비어있는 일등석 자리로 장애인을 옮겨주기도 했다. 지금은 적립 포인트로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고, 같은 이코노미석에서도 다리를 좀 뻗을 수 있는 자리는 가산요금을 내고 사야 한다. 확실히 실행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아이 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좌석도 돈을 내고 사야 한다고 해서 항공사의 돈벌이 방법이 한참 입방아에 오른 적도 있다. 이런 경제논리에 그동안 장애인 서비스도 평준화되어 본인이 지불한 정도에 맞는 좌석에 앉게 되었다. 그래도 “장애인 먼저”의 실천으로 우선 탑승이 되고 도움이 필요하면 휠체어로 탑승구까지 데려다준다. 목적지 공항에 도착하면 유럽과 같이 “장애인 마지막”으로 모든 승객이 내린 후 비행기를 빠져나오면 휠체어를 가진 도우미가 기다린다. 여긴 이름만 확인하지 시험은 보지 않는다. 짐 찾는 곳에는 짐 담당 도우미가 따로 있어 두 명이 된다. 문제는 팁이다. 두 명의 도우미가 붙으니 팁도 두배가 된다. 돈 없는 장애인은 여행도 쉽지 않다.
은근한 걱정을 하다가도 한반도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 바로 반갑고 설레는 맘으로 변하는 나의 조국 한국은 어떨까? 미국에서 숙련된 여행 노하우로 당연히 모든 승객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미적대고 있는 나에게 먼저 내리란다. 깜짝 놀라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면 어쩌냐고 하자 “장애인 먼저”를 확실히 실천하기 위해 탈 때도 먼저, 내릴 때도 먼저라는 것이었다. 다른 승객들이 오히려 내가 빨리 내리길 목매고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진 황망한 순간도 잠시였다. 목에 항공사 사원증을 단 직원이 나와 휠체어를 뛰다시피 밀어 뒤에 내린 승객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도 한 직원이 한 손에 각각의 휠체어를 잡고 두 명을 동시에 미는 것이었다. 속도감에 야호를 외칠 새도 없이 또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신이 돕고 있는 두 사람의 짐을 찾아 각 사람의 다리와 다리 사이에 싣고 또 달리고 달려 택시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가 모두 팁이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적어도 4명이 해야 하는 일을 한 사람이 하면서도 엄청 빠른 속도였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시간을 고려해 느긋이 마중 나올 가족을 오히려 내가 기다려야 했다.
여태 놀란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은 공항 대합실 앞에 있는 발렛 파킹에서 일어났다. 보통 여행을 떠날 때는 공항 멀리 떨어진 주차건물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번거로움 없이 공항 건물 앞까지 운전을 하고 와서 자동차와 키를 맡기고 발렛 티겟을 받고 들어가면 끝이다.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는 비행기가 착륙하면 바로 전화기를 켜고 차량을 가져다 달라고 발렛 서비스에 미리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조금의 지체함이 없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휠체어 경주를 하듯이 달려 공항 밖으로 나오면 이미 내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소위 미국에서 추구하는 매끄러운(Seamless) 서비스가 완성되는 숨 막히고 스릴이 넘치는 장애인 먼저의 실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도 굳이 어느 나라의 서비스가 더 좋다고 비교하기는 그렇다. 다만 전 세계가 (아! 못 가본 나라들이 아직 많은데..) 장애인을 배려하는 서비스가 있어서 장애를 가지고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참 좋다. 한국인이라 “빨리빨리”가 핏속에 흐르는지라 한국 공항에서의 서비스를 생각하면 스릴이 느껴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 글은 2020년 5월 13일 자 미주 한국일보에 게재되었던 것을 업데이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