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욱만 뒤로 가면 시야가 넓어진다.
한 명은 졌고 다른 한 명은 이겼다. 이긴 자는 듬뿍 담을 수 있게 쫙 편 손바닥을 받은 게 떨어지지 않게 약간 오므려 내밀며 “낼래?”를, 다른 한 손은 엄지 뒤로 둥그렇게 말아 넣은 중지를 언제든지 튕겨 진자의 이마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맞을래?”를 보이며 씽긋 웃는다. 진자는 승리자의 허를 찌르며 생각지도 못한 세 번째 옵션으로 답을 한다. 양팔을 쭈욱 옆으로 벌리며 “없다” “마음대로 해”라는 해탈한 얼굴을 푸욱 숙인다. 당황한 승자는 “낼래? 맞을래?”의 자세에서 굳었고 진자는 두 팔을 벌린 자세로 두 사내는 2000년이 넘는 긴 연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3박 4일의 불자체험을 했다. 작년에 62년 만에 찾은 꼬마스님과 시간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도착을 하자 법당과는 뚝 떨어진 한옥 독채를 내주었다. 휠체어가 드나들 수 없게 잔 돌과 흙으로 다져진 마당과 길, 셀 수 없는 울퉁불퉁한 돌계단, 신발을 벗고 툇마루로 올라야 들어가는 방들, 이방 저 방을 나누고 있는 문지방들, 눈이 말똥말똥해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새벽에 일어나는 일정, 멀리 떨어진 공양간, 꼬마스님은 얼굴을 마주칠 시간도 없이 바쁜 사찰의 하루. 마치 그들이 윤회 속에 있고 오히려 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구경을 하는 느낌이다.
첫날 혼자가 되자 “안심당” 이방 저 방을 다니며 환경을 익혔다. 화장실도 있고 작은 부엌공간도 있다. 어울리지 않는 큰 냉장고를 열자 생수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필요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다 사라져 버렸다. 물이 그렇게 삶을 풍성하게 채울 줄이야! 명상과 다도의 작은 방도 있다. 창문을 열자 소나무 숲과 작은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으음, 조으네~” 바로 창문을 닫았다. “자연보다 인터넷!” 안심당 구석구석을 아무리 찾아 헤매도 라우터는 없었다. 아니? “노 인터넷?” 갑자기 “안심당”공간에서 안심이 안된다. 몸단장할 곳을 찾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작은 화장실에 싱크대와 샤워기가 달려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틀어놔도 계곡의 물인가 찬기를 결코 잃지 않았다. 정신이 들게 찬물로 샤워를? “노, 노, 불가능!” 우왁!
이튿날, 새벽에 눈이 떠지자 아무리 힘들어도 본관 처소까지 올라가 몸이 불편해 하루 종일 누워계신다는 주지스님께 인사도 드리고 옆에서 친구가 되어드리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험한 돌길과 돌계단이 있지만 백여 미터 위에 있는 터라 용기를 내어 동이 트자마자 아직도 포기 못한 컴퓨터랑 책이랑 커피병을 싸들고 안심당을 나섰다. 가다 쉬다 하기를 한 30여분! 고군분투 끝에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 주지스님이 너무 반가워하셨다. 그런데 인터넷도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고행길인줄 알고 나선 길이 천국길이었다. 역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핫!
속삭이듯이 꼬마스님 귀에 안심당에는 뜨거운 물이 없느냐고 물었다. 안심당 안에 있는 작은 동자승 돌좌상 뒤에 스위치가 있다고 하셨다. 오후에 내려와 온수로 돌려놓고 마냥 기다렸다. 꼬마스님이 운전담당 처사님과 함께 나를 데리고 안양시를 구경시켜 주셨다. 어렸을 적 기억에 있는 안양유원지를 차로 돌며 과거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상권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니 행복한 추억이 나를 따스하게 감쌌다. 엄청 크고 넓고 깊은 수영하는 곳이 있었는데 다 커서 돌아보니 시냇물이 흐르는 아주 작은 계곡이 되어있었다.
사흩날, 어제 온수로 돌려놓았으니 드디어 따뜻한 샤워를 할 생각에 부풀어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에서는 바로 뜨거운 물이 나왔다. 물줄기를 샤워기로 돌리자 물이 안 나온다. 아니! 또 다른 난관이었다. 물을 잠그고 나름 맥가이버가 되어 샤워기를 분해했다.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모든 물구멍이 막힌 것이었다.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구멍들을 어루만졌다. 보슬비 같은 한 두 줄기가 힘없이 흘렀다. 그것이 희망이 되어 나는 더욱더 열심히 샤워헤드의 구멍에서 불순물을 떨어져 나가기를 애절하게 기도하며 문질렀다.
콸콸~ 속 시원한 물줄기는 아니지만 최고의 상태에 이른듯 했다. 몇 줄기로 머리를 적셨다. 머리 한가락을 적시는대도 한참을 대고 있어야 했다. 아! 평소에 얼마나 많은 물줄기가 내 몸에 닿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져 하수구로 흘렀던가… 센 물줄기가 내 몸에 맞고 튕겨 주변전체에 물세례를 주곤 했는데 안심당의 샤워기의 물은 겨우 내 몸에 닿을 정도의 보슬비정도라 다른 곳으로 튈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적은 양으로 주변에 피해 없이 살 수 있는 것을 왜 그렇게 흥청망청 살았을까? 처음으로 안심당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었다.
나흩날, 절약의 배움을 준 샤워기를 뒤로하고 처음으로 인터넷 없이 불편했던 안심당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작은 연못에 숨어있던 물고기가 기지개를 켜듯 지느러미를 벌리며 인사를 나왔다. 어디에서 밤이슬을 피했는지 모를 오리 부부도 연못가로 나와 몸단장을 한다. 이제야 보이네… 그동안 이차원적 컴퓨터 화면 속 세상에서 움직이던 작은 생명들이 눈에 그 비싼 VR가글을 뒤집어 쓰지 않아도 다이네믹한 삼차원의 세상으로 내 앞에 펼쳐져 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신기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낼래? 맞을래?” 하고 승리자인 부처님은 마치 다그치는 것 같아도 이미 얼굴에 가득히 번진 은근한 미소는 게임의 진자를 포용하고 있었고, 지고도 “없다”라고 배짱을 부리던 예수님도 이미 이긴 자와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리시고 계시다는 것을… 조금만… 사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발자국만 몸을 뒤로 하면 좀 더 넓은 시야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