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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짐을 벗다

수잔 교수님 께

by 교주

어제 생각지 못한 통화를 했다. 한참 동안 소식이 없던 미네소타 대학의 후배에게서 안부 이메일과 줌으로 영상통화까지 했다. 그는 내가 갈등을 빚었던 지도교수 수잔의 제자였기에 알게 된 사람이다. 요즘 정치상황 때문에 장애인이나 소수자에 대한 대학연구비 삭감의 심각성을 토로했고 리더십 계발의 중요성에 대한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공유하고 있는 삶의 조각인 미네소타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특히 같은 지도교수였으니 좀 더 깊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수잔교수와는 갈등으로 헤어졌지만 같은 전공자이기에 컨퍼런스를 가면 가끔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서로 "하이!"를 하고 지나친다. 내가 교수로 재직을 하며 나는 수잔에게서 배운 그랜트 쓰는 법과 연구하는 방법 등을 활용하여 수잔만큼 연방정부의 연구비를 가져오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연구비는 교수의 연구지원이기 때문에 모든 예산이 연구활동과 조교 월급으로 대부분이 나가고 교수지원은 정부지원 연구비로 대학에 돈을 내고 수업할 시간을 줄이는 식이다.


수잔과 일을 할 때 다른 조교들은 50%로 일주일에 20시간씩 일을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75%로 30시간을 일하도록 했고 방학 때는 풀타임으로 일을 주곤 했었다. 대학에서 거의 모든 조교들이 50% 일을 하고 필요한 경우 74%까지 시간을 주는데 그 이유는 75%부터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조교의 의료보험비까지 내주어야 하기 때문으로 지출을 줄이기 위해 74% 이상 조교직을 주지 않는다. 어쩐 일인지 수잔은 나에게 늘 75% 이상을 주었고 나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일을 했다.


내가 교수가 된 후에 연방정부의 연구비를 가져와 조교를 쓰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수잔의 배려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느꼈다. 직접 예산을 짜고 실행을 해보니 조교월급 외에 그 뒤로 나가는 부가혜택들이 많은 것이다. 부가혜택은 세금 및 휴가비, 상해보험, 의료보험 등 보이지 않게 조교 한 명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결코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아! 수잔은 나에게 정말 많은 투자를 했던 것이다. 감사한 마음이 마음속 깊이 느껴졌다.


수잔은 미네소타 대학으로 옮겨와 종신교수가 되기 전까지 연구에 몰입했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경쟁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마치 그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고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내가 수잔교수의 제자가 되기 전까지 나를 지도해 주던 교수는 나에게 수잔은 백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수준의 천재학자라고 했다. 난 인간미가 없는 그가 늘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의 가치관을 은근 경멸했었다. 그런데 그가 종신계약을 하자마자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졌고 집을 샀다. 오랜 계획을 해왔다고 한다.


나는 그 아이가 2살쯤 될 무렵 수잔과 헤어졌기에 아이의 소식도 궁금했었다. 한참 뒤 한 교수를 통해 수잔이 딸아이가 학교 입학을 하자 발런티어로 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의아한 소식을 들었다. 그 경쟁 마녀가 일반 초등학교에 가서 보조교사로 무료봉사? 그 아이는 1988년 생이다. 어렴풋이 37살쯤 되었는데 시집은 갔을까? 인간관계는 늘 잘 가꾸어야 하는 것이지 관계가 뒤틀어진 후에 되돌아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나는 전화기를 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참았다.


통화를 하던 후배가 말하는 수잔교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변한 것이 사실이었다. 학문만이 최우선이었던 자신의 삶에 자녀양육을 최선으로 둔 것이다. 딸이 시집을 가서 아이가 있고 수잔은 할머니가 되어 손주들과 너무너무 행복해한다는 소식을 인스타에서 봤다며 알려 주었다.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던 수잔교수의 인스타를 열었다. 거기 있다. 딸의 얼굴에서 어릴 적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어 낯설었지만 수잔의 웃는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예쁘다. 행복해 보인다. 수잔은 백인 남성의 아이보리 타워라고 하는 대학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며 쟁취하는 행복에서 이제는 가족 안에서 소소한 참 행복을 찾은 것이다. 사진들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친 딸과 손주들 사이에서 늘 건강하며 행복하게 살 것을 사진을 통해 확인하니 나에게 해주었던 좋은 일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감사함만 남고 갈등했던 아픔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수잔! 나를 만든 소중한 멘토 중의 한 사람으로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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