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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Dec 10. 2023

나의 유학방랑기 6

경쟁과 위기, 그리고 새옹지마

수잔 교수님이 새 지도교수가 되면서 나는 더 가깝게 수잔과 일을 했었다. 수잔연구의 모든 통계를 맡아 분석을 하고 분석결과를 보기 쉽게 요약을 해 수잔 책상에 놓아주었다. 수잔과 옆방의 시각장애 전공교수님인 마리교수님과 나는 이상하리만치 학교밖에서도 친하게 지냈다. 가끔 수잔집에서 다른 조교들도 함께 모여 게임파티를 하기도 했다. 즐겨했던 게임 중에 젠가게임이라고 손가락만 한 나무토막을 가로 세로로 3개씩 놓아 30센티 정도의 탑을 쌓아놓고 순서에 따라 밑에서 한 개씩 빼서 위에 놓는 게임으로 먼저 균형을 잃어 탑을 쓰러트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늘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기에 그런 게임 중에도 어느 누구의 주의를 끌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수잔이 모인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커피를 많이 마시게 해서 손을 떨어 먼저 탑을 무너 뜨리게 하자는 말을 했다. 또 스파이를 잡는 게임에서 총을 차지해야 하는데 그 총이 실린더를 회전시켜 내부에 있는 여러 개의 총알을 교체해 가면서 연발 사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총기로 "리볼버 (Revolver)"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 단어를 몰라 "건 (Gun)"이라고 하자 수잔이 바로 "얘가 리볼버 단어를 몰라 약게 건이라고 했다"며 비웃듯이 말했다. 늘 관심을 받지 않고 자라온 내게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쓰며 못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수잔교수의 태도에 고개가 갸우뚱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부터 수잔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고 조교들과 모두 모여하는 회의에 나를 참석시키지 않기 시작했다. 수잔 연구실로 들어가는 바로 코앞에 있는 내 방에 앉아 불편하기가 그지없었다. 많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왜일까? 나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뭔가 알고 있지만 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뭔가 잘못했으리라 열심히 일을 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참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수잔은 인공수정으로 임신 중이었고 입덧도 심한 데다가 혼자 아이를 낳는 두려움을 나에게 풀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달이 그렇게 지나가자 나 혼자 하는 너무나 많은 생각으로 일에 집중을 하기 어려웠다. 다 버리고 다른 대학으로 옮길까? 미국에서도 학교를 옮기면 교육과정이 달라서 박사과정을 거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필요한 학점을 다 이수한 상태에서 움직이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느 때는 그래도 나에게 그렇게 많은 기회와 자유를 주었던 좋은 교수님이니 뭔가 좋은 뜻이 있겠지 하고 자신을 달래기도 했다. 또 어느 때는 비굴해도 모든 걸 참고 여기서 학위를 끝내고 그 학위증을 수잔교수 앞에서 부욱 찢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숨이 막혀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때 비서가 나를 불렀다. 나보고 이를 꽉 물고 잘 이겨내라고 하며 수잔이 나에 대한 평가를 적은 편지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읽어보니 구구절절이 맘에 안 들었던 내용을 몇 장에 걸쳐 써 내려간 편지였다. 너무 억울한 내용이 많았다. 오해인 것이 많고 잘못 알고 있던 교수의 마음이 안타깝게 적혀있었다. 비서는 내가 사인을 하고 나면 나의 학생기록부에 남길 것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내용 중에 다른 조교들도 알고 있는 사건이 있기에 내가 교수에게 항의하면 내편에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모두들 졸업을 빨리 하는 것이 목표라 그런 일에 말려들 수 없다며 거절했다. 옆에 있던 유학생 친구들 사이에는 내가 오늘내일 곧 미네소타를 떠날 것이란 말이 돌았고 억울하다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고 아무도 내 편을 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오그라들게 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있던 많은 억울한 내용에 맞서 나라도 내편을 들어야 한다고 결정에 도달하자 다른 학교로 옮기지 않고 다른 교수와의 조교일을 찾아 당당하게 그에게 맞서겠다는 결심을 했다. 학교 내에 조교 일자리를 공고하는 부서에 가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때 거기 있는 직원에게 부당한 처우를 하는 교수를 제보하는 곳은 없느냐고 우연히 물어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 말하면 된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는 일을 지금 그만두어도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월급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냥 다른 일을 찾겠다고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나는 바로 조교일을 찾을 수 있었고 학과장에게 새 지도교수도 배정받았다. 일주일도 안되어 정리가 되자 바로 사표를 냈다. "오늘로 일을 그만두고 연구실은 토요일에 비우겠다."라고 짧게 써서 수잔의 우편함에 넣는 순간 두려움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온몸이 떨려서 겨우 사표만 우편함에 넣고는 줄행랑을 했다. 수잔이 그 글을 보는 순간 우리 집으로 달려와 때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집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음날 등기우편이 왔다. 당장 돌아와 일을 다 끝내라는 명령적 내용이었다. 사정을 알던 한 미국친구가 아무 대답도 설명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한 조언에 따라 나는 아무 답장을 하지 않은 채 새 조교 자리를 준 교수를 보러 갔다. 그 교수님은 수잔교수가 학과전체에 나를 채용하지 말라는 공지를 보냈지만 그런 갈등은 나와 수잔과의 문제이라서 알고 싶지 않고 다만 내가 그의 과목을 들었을 때 본 나의 평가에 따라 채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같은 과 교수의 공문이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매 학기마다 성과를 평가하여 재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내편도 수잔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적으로 나를 평가하고 조교로 써 준 그 교수에게 너무 고맙다고 하고 매 학기 평가하는 것에 동의했다. 


며칠 후 학장이 나를 불렀다. 나는 무서워서 조교상담을 했던 사람에게 연락을 해 학장을 보러 갈 때 함께 갔다. 학장은 한 시간 가까이 내편의 이야기에는 귀를 닫은 채 모든 일을 갑자기 다 놓고 그렇게 떠나는 것은 학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니 빨리 다시 돌아가 모든 자료를 정리하라는 이야기만 되뇌었다. 좌절감이 엄습할 때 바로 그때 학장 앞에 놓여있는 수잔교수의 성난 편지를 보았다. 그 편지에는 내가 수잔에게 주었던 "내가 할 일"리스트 첨부되어 있었다. 수잔교수에게 질책을 받은 후 내가 먼저 앞으로 성실히 끝내겠다고 약속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학장에게 바로 타이핑이 된 그 윗부분의 리스트는 내가 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밑에는 손글씨로 쓴 것은 수잔이 내가 리스트의 일을 마치는 대신에 박사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종합시험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적은 날짜라고 말했다. 


열심히 일을 하던 중에 나는 통계 중에 실수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바로 수잔에게 알렸다. 수잔교수는 내 실수로 인해 자신의 이틀을 허비하게 했다며 나에게 종합시험을 다음 학기까지 볼 수 없다고 했다고 학장에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바로 수잔교수가 먼저 계약을 깬 것이고 부당한 처사라고 했다. 물론 내가 통계처리에 실수를 한 것이 교수님께 얼마나 폐가 되었는지는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그 교수의 이틀을 허비했다면 나의 시험을 이틀만 미루어야 하는데 그는 나에게 한 학기 동안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했으니 내가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사회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실수를 할 수 있기 마련이고 나는 배우는 학생이라 실수를 하며 배우는 것이지 않겠느냐고 학장에게 말했다. 더욱이 그 교수는 사회에서 나에게 월급을 주는 상사이기보다는 부족한 나를 교육하는 스승으로 이틀의 손해 때문에 한 학기를 붙잡아 놓는 벌을 준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해서 내가 떠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야기를 하자 처음으로 학장이 말을 하지 못하고 알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학생들은 모두 일도 잘하고 필요하면 밤샘작업을 해서라도 교수가 준 일을 깔끔하게 해 내곤 한다. 나도 필요할 때는 며칠씩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해 내었었다. 그래서 미국교수들은 한국인 조교를 선호하기도 하고 졸업을 늦추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유학생간에 돌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강의는 주지 않는다. 학장과 수잔은 나의 입장을 반박을 할 수 없었고 나는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조교일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헤어지고 난 어느 날 나는 학과 근처에서 한국유학생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저기 수잔 온다, 피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피해야 하느냐며 그냥 앉아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를 본 수잔이 오히려 나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그 학기에 새 지도교수와 종합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다음 단계는 박사논문만 쓰면 되는 것이었다. 수잔교수는 같이 연구하는 두어 명의 동료교수들과 함께 대학 캠퍼스 밖에 좋은 건물을 빌려 연구소를 차리고 있었는데 나와 헤어진 뒤 한 학기가 지났을 때 불화로 연구팀이 깨어져 혼자 캠퍼스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수잔과 나 사이의 갈등이 내 잘못이 아니고 수잔교수님의 욕심이었던 것이 밝혀졌다며 다 지난 후 내 편을 드는 척했지만 난 이미 주어신 새로운 내 일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하는 수잔교수님 덕분에 나는 다양한 연구방법을 접할 수 있었고 교과서를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지식과 연구기술을 배웠기에 지금까지 감사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하지만 수잔교수님과의 위기는 종합시험만 제때에 끝낸 것 이외에 너무도 어마어마 한 기회를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새로 같이 일하기 시작한 교수님은 유아발달을 전공하는 분으로 새롭고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었다. 함께 연구에 동참하며 영유아들의 인지발달을 측정하는 방법을 박사논문으로 연구하게 되며 모든 경비와 세명의 조교까지 붙여주어 78명의 유아를 대상으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어서 수월하게 논문을 쓸 수 있었다. 논문에서 인지발달이론의 대가인 스위스 출신의 피아제(Piaget, 1896-1980)의 이론을 반박해 보는 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스승에 대한 최고의 존경은 그에게 학문적 도전과 건설적 비판으로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라고 믿고 있는 나의 신념을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었기에 스스로의 학문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음에 죽어서 피아제 박사를 만나면 열띤 토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이 난다. 또한 수잔 연구팀보다 더 큰 연구실에서 더 많은 조교들과 일을 하게 되며 그중에 친해진 미국 친구가 자기가 시간강사로 일하는 2년제 대학에 시간강사 자리를 소개해주어 박사를 끝내기 얼마 전부터 미국대학에서 강의를 할 기회까지 갖게 되었으니 새옹지마가 바로 이럴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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