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박사를 마치기 얼마 전 학교에 안내문이 붙었다. 포닥 (Post-doctoral fellowship으로 박사과정 후 1-2년의 전공과 수련과정) 신청자를 구하는 공고였다. 의대나 공대와 같은 자연과학계열에서는 흔히 있는 기회지만 인문사회과학 중에서도 특수교육에서는 거의 처음인 경우였다. 우리 대학에서 함께 박사과정을 하던 많은 친구들 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도 모집공고가 배포가 되었고 경쟁이 꽤 심했다. 그런데 그 공고에 조건이 있었다. 신청자는 미국 시민권자이거나 영주권자여야 했다. 나는 외국 유학생이라 일단 신청조건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뭐가 씐 듯이 그냥 지원서류를 제출했다.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도 그렇고 함께 일하던 교수들과 연구원들도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그냥 지원을 실습하는 마음으로 했고 자격이 안되면 바로 거절편지를 받을 거라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기대를 해 보겠다고 했다.
구비서류 중에 추천서가 있어서 나는 논문 지도교수에게 이메일로 포닥 공고문과 나의 이력서를 보내며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청을 했다. 며칠이 지나 연구실의 전화가 띠리링 울렸다. 나를 찾는 것이었고 수화기 저쪽은 굵은 목소리의 지도교수였다. 짧은 인사 후 내가 유학생이라는 것을 아시던 교수님은 "너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니? 외국 유학생이지 않니?"라고 물었다. 나는 "네 맞아요. 저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일단 지원조건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내 서류는 심사도 하기 전에 탈락으로 될 것이 100퍼센트이기 때문에 추천서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내용을 미안한 마음속에 숨겨 이리저리 빙빙 돌려 힘들게 표현을 하고 계셨다.
잠시 나는 침묵을 하다가 입을 떼어 질문을 했다.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이 써주신 추천서 한 장으로 바로 다 취업을 하나요?" 교수님은 "No"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만약 교수님이 다른 미국학생에게 대학교수 임용추천서를 100번을 써서 한번 취직이 된다면 나는 이번 한 번이 그 백번의 추천서중에 하나로 생각하고 앞으로 추천서를 99번만 요청할 테니까 안될 것을 알더라도 꼭 추천서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요구가 정당하게 들리셨는지 성심성의껏 추천서를 잘 써주겠다며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를 하시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한국이라면 감히 교수님과는 대화로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역시 그동안 미국에서 미국교육을 잘 받고 미국교수님께 정당한 요구를 한 것이었다고 당당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온몸이 떨렸다.
얼마 후 연구팀장인 박사님이 나에게 진짜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자 나는 아직 거절 편지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고 연락을 받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며칠이 더 지나 복도에서 학장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학장은 포닥 프로그램 담당교수가 찾던데 만나봤느냐고 물었다. "아! 진짜 안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외국학생이라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학장은 "아니, 너를 포닥으로 선정하려고 하는데 몇 가지 질문이 있다"라고 하더라며 빨리 찾아가 보라고 했다. "우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포닥은 특수교육 전공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지만 장애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 일반사회로의 적응을 돕는 전환교육이 미국에서 막 시작되던 때에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애인의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바로 내가 유학 전까지 특수교사로 일했던 곳이 "재활원"이었고 대학 졸업 후 석사까지 글을 써 발표했던 것이 장애학생들의 재활에 관련한 논문들이었다. 박사과정을 바로 끝내기 전에 자기 글을 발표한 사람도 많지 않지만 특수교육을 하는 사람이 "재활"의 입장에서 교육 이외에 취업과 자립생활등에 관련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원자 중에 내가 가장 그 포닥의 목적에 부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포닥 담당교수를 만나자 그는 외국학생인 내가 적어도 포닥기간인 2년 동안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로그램을 지속할 것이라는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계약서를 썼지만 좀 웃겼다. 내가 계약을 해달라고 징징대어야 할판에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2년을 있겠다고 계약서를 쓰자고 하는 상황이 재미있었다. 그들은 미 연방정부에서 받은 포닥예산을 왜 이 외국인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2년 동안 포닥과정의 훈련을 잘 마치겠다는 서약까지 했음을 제출하여 예외적인 승인을 받아내었다. 같이 박사과정에 있던 친구들과 두어 명 있었던 한국 유학생들이 모두 놀랐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에는 포닥과정을 자신의 목표에 넣기도 했다. 이제는 박사과정을 빨리 끝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6개월이 넘도록 나는 쩔쩔매었고 8개월이 넘어서야 겨우 끝내고 드디어 포닥을 시작하게 되었다.
포닥에서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장 많은 예산을 책정해 수집한 장애학생들의 졸업 후 5년까지의 근황을 알아보는 새로운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하는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박사과정에 있던 열댓 명의 조교들과 함께 일을 했다. 그러면서 한 미국친구가 소개해 준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유아발달과 심리학 개론을 가르쳤다. 어느 날 그 대학의 학장이 강의평가를 위해 들어왔었다.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학기가 끝나자 내가 현재 포닥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풀타임으로 가르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하다고 했다. 포닥은 대학교수로 가기 위한 수련기간인데 나는 연구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두 가지 경험을 통해 2년 뒤 대학교수로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 수련과정과 목표설정을 내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 포닥이라고 답했다. 대학에서는 전환교육이라는 전문적 과정을 데이터 분석과 보고서를 쓰고 새로운 연구과제로 그랜트 쓰는 법을 배우지만 외국학생인 나에게 가르치는 경험을 주지 않아 나는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경력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장은 1년 동안 유아휴직을 떠나는 교수를 대신에 그 자리에 나를 임용했다.
만약 내가 지원조건만 보고 돌아섰다면, 추천을 해도 소용이 없지 않느냐는 지도교수에 말에 포기를 했다면, 많은 주변사람들이 위로 겸 포기하라는 말에 꿋꿋하지 않았더라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나 스스로의 믿음을 실천했기에 나는 포닥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소중한 것은 그런 과정들을 통해 "1퍼센트의 가능성 밖에 없다"라는 상황을 맞으면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니까 충분히 도전해 볼 가능성이 있다"라는 이야기로 이해를 하고 나는 그 1퍼센트의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보자는 의지가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