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님의 급 사과
처음 지도교수님을 만나러 갔다. 늘어진 티셔츠와 색 바랜 청바지로 허름하게 입으신 연세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분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선 나를 밝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그분은 지리산 도사님이나 짚고 다니실 듯한 구불구불한 나무지팡이를 짚고 연구실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나에게 필요할 것 같은 자료들을 건네주셨다. 지체장애를 전공하시는 분이라 수업 중에는 절단된 한쪽 다리에 끼고 있던 의족을 벗어 보이시며 무릎 위가 절단된 사람과 무릎아래가 절단된 사람들의 기능적 차이를 설명하셨다. 그리고 아무리 의족이 절단된 부분의 위쪽 허벅지 전체를 감싸게 디자인되어 힘을 분산하기 때문에 서있거나 걸을 때 직접적으로 절단된 단면에 모든 하중이 걸리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만드신 발바닥으로 땅을 짚을 때와는 다르게 절단된 부분이 늘 불편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휠체어를 타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 큰 장애 같지 않아 보이는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각자 겪는 다른 불편함을 들으며 결국 나만 힘든 세상은 아니라 누구나 각자가 짊어진 어려움이 있다는 조그만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다른 대학에서 미네소타로 이직을 해 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수잔이라는 여자교수님께 조교로 배정되었다. 수잔은 올 때부터 무성한 소문이 학생들 간에 퍼져있었다. 너무도 똑똑할 뿐만 아니라 연구비 예산도 많이 가지고 있어 박사과정 학생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수잔교수님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보는 순간 어려서부터 나에게 무서운 존재였던 언니의 얼굴이 겹쳐 보여 두려운 생각이 앞섰다. 논문을 쓰기 전까지 필요한 과목들을 듣고 수잔교수의 조교로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지도교수를 별로 만난 일이 없어 그냥저냥 시간이 지났다. 연구비도 많고 연구과제가 많았던 수잔교수님은 나외에 7-8명의 조교를 두고 있었고 나는 그의 모든 연구자료를 분석하는 통계를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기에 두려운 마음이 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며 회의나 분석결과를 보고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다른 조교들이 커다란 방을 함께 사용하는데 비해 나는 교수옆방에 내 연구실을 따로 배정해 주어 조용히 내 일을 할 수도 있었고 수잔교수님이 드나드는 것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수잔교수님은 싱글이었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개인일이나 학교일 또 연구과제등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하여 스케줄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수잔은 회의가 많아 타주로 여행도 자주 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인 에밀리라는 강아지가 있었기에 여행을 갈 때면 나에게 자기 집에 와서 자면서 강아지를 돌봐달라고 했었다. 그 강아지는 차이니스 퍽(Chinese Pug)이라는 종으로 불도그보다 적지만 코가 불도그처럼 납작하고 얼굴에 붙어버린 귀여운 강아지였다. 나는 강아지와 수잔교수님의 침대에서 잤었고 아침이 되면 강아지 옷을 입히기 위해 옷장문을 열고 놀라기도 하고 했다. 강아지 옷장이 사람만큼 옷으로 가득 차 있고 많은 옷들이 수잔과 커플룩으로 맞춰져 있었다. 냉장고에서 수잔이 먹는 음식을 꺼내 먹었고 그의 집에서 마치 나는 똑똑한 교수인 그의 모습으로 사는 듯한 모습이 느껴져 스스로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의 출장은 잦았고 내가 그 집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나쁘지는 않았다. 공부와 일 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특히 잘 따르는 에밀리가 있어 오히려 적막한 유학생활에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연구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조교들 모두를 모아놓고 함께 회의를 했었다. 회의내용뿐만 아니라 가끔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이 느껴지는 개인적 대화도 있었다. 영어는 나에게 참 좋은 언어이다. 왜냐면 원하고 필요할 때는 신경을 쓰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일과 관련되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나 별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할 때면 신경을 끄면 쉽게 어떤 말도 아무 의미 없는 백색소음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국말이면 듣기 싫어도 그냥 귓속을 파고들어 그 의미를 알 텐데 영어는 껐다 켰다 하는 신기한 기능이 가능했다. 그런데 갑자기 쇼킹한 이야기가 들렸다. 그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어디에든 이력서를 제출하면 우리는 수북이 쌓인 이력서 중에 가장 위에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을 했다. 결국 경쟁에 가장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가장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그냥 두려웠다.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력서의 맨 위로 올라가는 그 자체를 목표로 한다는 생각이 좀 가소롭게 느껴졌다. 나의 목표는 그보다 크고 높아서 내 목표를 성실히 추구하다 보면 이력서의 맨 위도 갈 수 있을 테고 교수도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때부터 수잔교수님과의 경쟁심이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수잔은 밴더빌트 대학이라고 유명한 대학교에서 4년 정도를 재직하다 우리 대학으로 옮긴 사람이다. 미국에서는 박사를 마치고 교수가 될 때 보통 종신계약을 할 수 있는 테니어 트랙 (Tenure Track)의 조교수로 임용이 된다. 종신계약은 6년 동안 평가기간을 갖는다. 그러니까 테니어를 받고 부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6년을 기다리며 교수평가를 받아야 한다. 가끔 4년이나 5년 차에 조기승진이나 종신계약을 신청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훨씬 높은 수준의 기준치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3-4년이 될 때 학교를 옮기면 테니어를 받고 가거나 크레디트를 받아 1년 후에 테니어 승진심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같은 학교에 있는 것보다 1-2년 빨리 안정된 생활이 가능해진다. 수잔은 능력도 있고 빨리 안정하기 위해 4년의 경력을 가지고 미네소타로 옮긴 사람이고 옮길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연방정부의 연구비를 함께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오면서부터 그의 실력과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바로 다음 해에 부교수가 되며 종신계약을 했고 안정된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자 그는 체크리스트에 있는 다음 단계의 일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수잔은 몇 번의 인공수정의 실패 후 결국은 임신에 성공을 하였다. 역시 그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계획을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지도 교수님은 학기 초와 학기말에 한 번씩 서류에 사인을 받기 위해 뵙는 정도였다. 한 2년쯤 되던 해에 지도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머리도 부스스하고 반겨주는 웃는 얼굴에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생각지도 않게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유학이 끝나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이냐고 했다. 인간적으로는 좀 무서워했고 큰 존경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봐왔던 수잔 교수님의 연구활동과 수업하는 것을 봐온 나는 그 모습이 내가 졸업후 하고 싶은 모습이었기에 서슴지 않고 "나는 연구도 하고 교육도 하는 수잔 교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지도교수님은 "불가능 한 소리. 수잔은 백만명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천재적인 교수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에혀~~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대고는 짧게 대답했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지도교수님을 바로 사과를 하셨다. "네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고 수잔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다 보니"라며 "너도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미안해 실수로 한 말이었어." 글쎄 나도 뭔 생각에 그렇게 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가? 내 능력과 잠재력이 얼마만큼인지 또 내가 얼마만큼 노력하지도 모르고 수잔이 큰 사람이니까 그냥 넌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말에 가치를 두거나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맡았던 모든 논문지도 학생들을 다른 교수님들께 나누어 주셨다. 자연스럽게 나는 수잔에게 새로 배정이 되었다. 한 뜨거운 여름에 있는 독립기념일에 지도교수님은 학생들과 교수들을 그의 농장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나도 나와 친했던 교수님과 함께 운전을 해 도착했다. 처음으로 미국 백인들이 함께 독립기념일을 즐기는 방식을 보았다. 그의 농장을 굉장히 넓었다. 바비큐도 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말발굽 던지지, 다트게임, 카드놀이등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 떨고 먹고 마시고 해가 질 무렵에서야 파티가 끝나고 여기저기서 하는 불꽃놀이로 여름밤의 하늘을 영롱하게 수놓았다. 지도교수님은 그 후 학교에 나오시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골육종 (Bone Cancer)으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 후 우리 대학에는 지체장애 전공이 없어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수잔교수님이 지도하는 지적장애 교육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