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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Nov 20. 2023

아직도 날지 못하고 있는 나비에게

어이 제자! 나비가 아니라 고치가 문제일쎄...

우리 주변에는 좋은 말들이 참 많다. 듣고 감명 깊었던 것들만 내 생활에 적용하자고 해도 차고 넘친다. 각자 살아가는 방법과 목표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나에겐 보이지 않는 그 높은 이상을 쳐다만 보다가 그 이상을 실현했을 때의 자아모습과 현재 처해있는 자아와의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때면 가끔씩 혹독하게 자신을 자책하며 인생이 힘들게 느껴지는 일도 많다. 나는 고등학교 때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성인이 읽으면 더 좋은 동화책의 내용을 참 좋아했다.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으로 남들 사이에서 높은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남을 짓밟기도 하고 끼인 상태에 불편해하기도 한다. 그렇게 위로 위로 올라가려는 과정에 대화가 통하는 친구도 만나고 경쟁적으로 위로 위로만 올라가던 일을 떠나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기도 하지만 경쟁의 기둥에서 이탈한 후에 많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면 다시 그 기둥을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 이에 아픈 이별을 하고 다시 경쟁의 기둥 오르기를 시작한다. 올라가고 있는 과정에서는 맨 위에 올라간 사람을 동경하기도 하고 나 자신은 왜 아직 저 위치로 못 가고 있는가 자책을 할 것이다.


나는 동화나 우화등에 이야기와 결과의 이면을 상상해 보길 좋아한다. 예를 들어 "여우와 신포도"에서 여우는 높이 달려있는 포도를 먹을 수 없자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포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근데 그 여우의 이야기를 좀 더 발전시켜 보면 여우는 만고의 노력 끝에 그 포도를 손으로 넣게 된다. 얼마나 달고 맛있을까를 상상하고 기대에 부풀어 포도를 하나 따서 입에 넣는다. 그런데... 진짜 시다! "퇘 퇘" 헛 일을 한 것에 실망하며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밑을 보니 밑에는 아직 올라오지도 못하고 있는 여우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오르지 못한 여우들은 그 포도가 얼마나 맛있을 까 생각하며 높은 곳까지 올라 그 포도를 손에 넣은 여우를 선망과 존경과 부러움으로 올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신포도에 실망한 여우는 갑자기 "이렇게 맛있는 포도가 있을 수 있을까?" 하며 신포도를 입에 넣고 부러워하는 여우들을 향해 맛있는 척을 하는 것이 "여우와 신포도" 2편인 것이다.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도 2편에서는 일만 하던 개미는 아파서 일찍 죽게 되고 노래만 부르던 베짱이는 음악으로 돈방석에 앉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늘 2편에 관심이 있는 나는 당연히 "꽃들에게 희망을"의 2편을 생각해 본다.


애벌레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나비가 되어 세상의 꽃들에게 희망이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당연히 위로 올라가는 본능을 가진 애벌레가 그 잠재력을 펼치는 방법을 깨닫고 "자신"을 찾는 것인데 그 2편은 어떻게 될까? 아직 날지 못하고 있는 나비에게 희망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세상의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스스로의 노력과 죽는 것과 같은 공포의 시기를 거쳐야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비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생김새도 다르고 이동방법도 완전히 다른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과정을 거쳤는지 아직 날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내가 아직 나비가 아니라서 아파하기 전에 애벌레처럼 스스로의 몸에서 실을 뽑는 노력과 자신을 깜깜한 고치 속으로 가두어 죽는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감수해야 하는 그 과정을 겪어내야 만 한다. 나비만 보고 날지 못하는 자신을 아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의 삶은 나비만 보면 불행하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애벌레가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스스로의 몸을 꽁꽁 감싸는 동작을  “스스로” “능동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능동적으로 열심히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서의 두려움과 싸우는 고통을 선택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비가 되려는 피나는 노력과 죽음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지켜내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내 안에 있던 나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지는 않는다. 책에 나오는 대로 기둥 오르기만 하다 시간을 놓치는 애벌레도 있고 실을 제대로 뽑지 않고 설렁설렁하게 하게 만든 고치 안에서 말라 죽는 애벌레도 있을 테고... 그러니 내 안에 있는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노력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나라면 이 동화 속에 나오는 나비를 목적으로 삼기보다는 죽는 것과 같은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과정을 올바르게 잘 준비하고 이겨내면 나비는 당연히 따라올 테니까... 나비는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죽인 애벌레가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높이 나르며 세상에 있는 꽃의 희망이 되는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래 내가 나비가 될 애벌레가 아니라면 고치를 틀어야 할 필요도 없다. "다른 것"이 되어야 하는 내 안의 잠재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되든 애벌레가 겪어야 하는 과정과 같은 어려움은 그 정도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또 다른 형태의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찾아봤다.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나비뿐일까 하는 생각에서 요즘 유행하는 ChatGPT에게 물었다. "챗GPT야, 꽃이 잘 자라려면 어떤 요인들이 있어야 해." 식물이 자라는 4대 요소가 빛 온도 수분 토양이라고 한다. "토양을 좋게 하는 것은"하고 묻자 "토양에게 희망을"이라고 볼 수 있는 “지렁이”를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 그리고 음식물찌꺼기와 퇴비도 꽃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들이었다. 나는 또 궁금했다. 나비가 꽃과 꽃을 옮겨 다니며 수정을 시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지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나비뿐일까? 비슷한 것 중에는 벌과 나방이 있다. 하지만 벌새도 꽃들의 희망이고 하물며 챗GPT는 새로운 연구물들을 소개하며 딱정벌레, 파리, 귀뚜라미, 박쥐, 브라질 청개구리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상의 꽃에 이런 매개체들이 있다면 바닷속의 해조류에게는 갑각류가 수정을 한다고 한다.


꼭 나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보다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나비의 일보다 더 힘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나비가 아닌 모든 생물과 사람들이 어떤 형태이든 서로에게 희망을 되고 미래를 준비한다면 다 아름답다. 왜 우리는 나비가 돼야 하나? 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는 나비가 주연으로 등장하지만 우리 모두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힘든 과정의 중요성을 배워 각자의 삶에서 "나"를 잘 가꾸어 "희망"이 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을 한다. 애벌레에게 "애벌레이기를 포기할 만큼 날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해"한다고 조언을 한다.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애벌레에게는 "죽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지 않기도 해"라고 안심시키기도 한다. 아직 날지 못하고 있는 당신! 아직도 나비가 아니라서 아픈 게 아니라 완전하게 "애벌레이기를 포기할 만큼"의 노력하는 자신만의 시간이 없는 것을 아파하는 것은 아닐까?


영국의 유명한 여성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1929년에 쓴 "자기만의 방"이란 책을 난 참 좋아한다. 1882년에 태어나 1941에 우리 곁을 떠난 그는 이 책에서 여성도 남성과 같이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립적인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페미니즘의 원론적이 기초를 마련한 책으로 지금까지 많이 읽히고 있다. 그는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사소한 한 가지 의견만을 제시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남편과 아이들과 늘 같이 있어도 자신만의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자신만의 방"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나도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빌려 많은 여성들에게 권유해 왔다. 마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가 자신을 고치에 가두는 것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일을 떠나 하루에 5분이든 30분이든 자신만의 방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가 겪어내야만 하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흡사 닮았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것을 가끔 생각 속에서 아파하기 보다는 고치만들기를 아직도 미루고 있는 자신에게서 실을 뽑듯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는 시간을 늘리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필요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날 새로운 모습으로 나르는 나비가 되어있는 자신을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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